지난 편에서 헤롯 대왕이 끔찍한 병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37년의 잔혹하지만 효율적인 통치가 끝난 거습니다. 그런데 한 폭군의 죽음은 결코 조용한 결말이 아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7권 후반부는 그 뒤에 벌어진 일들 — 성대한 장례, 유월절의 유혈 진압, 로마에서의 후계 다툼, 그리고 유대 민중이 "더 이상 어떤 헤롯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친 전례 없는 장면 — 을 기록합니다.
이번 편은 헤롯 왕국이 셋으로 쪼개지고, 끝내 로마 직할 속주로 넘어가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무대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전환의 시기입니다.
살로메의 한 번의 선행
기원전 4년 봄, 헤롯이 숨을 거두었습니다(AJ 17.§191). 그런데 지난 편에서 본 그 소름끼치는 명령 — 자기가 죽는 순간 여리고 경마장에 가둔 유대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 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헤롯은 그래야 온 유대가 진정으로 울 거라 믿었습니다(AJ 17.§174-181).
다행히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누이 살로메가 헤롯이 숨을 거둔 직후 모든 포로를 즉시 석방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광기에 따를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AJ 17.§193). 요세푸스는 살로메의 이 한 번의 인도적 행동을 두고, 그녀가 평생 꾸민 음모를 "반쯤 용서할 만한 선행"이라 논평합니다. 두 왕자의 파멸에 가담했던 그 손이, 마지막엔 수많은 가문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금관을 쓴 시신, 200 스타디온의 행렬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요세푸스는 그 호화로움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 금관과 보석으로 장식된 관대, 보라색 왕의가 덮인 시신, 그 옆에 놓인 홀과 왕관, 관을 멘 자녀들과 친척들. 근위병이 완전 무장으로 호위했고, 이어서 트라키아·게르만·갈리아 용병 부대가 행진했으며, 500명의 노예와 해방노예가 향료를 손에 들었습니다(AJ 17.§196-199).
운구 행렬은 여리고에서 헤로디움까지 200 스타디온(약 37km)을 이동했습니다. 헤로디움은 헤롯이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한 지점에 세운 원추형 요새였는데, 그는 그 정상에 묻혔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헤로디움 무덤은 2007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에후드 네처가 발굴해 그 위치가 실제로 확인됐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이 고고학으로 뒷받침된 드문 사례입니다.
유월절, 성전 뜰을 적신 피
장례 후 7일간의 애도가 끝나자 아르켈라오스가 왕복을 입고 성전에 가서 백성의 탄원을 받았습니다. 마침 유월절이 다가오는 때라 예루살렘에는 순례자들이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요구를 들고 나왔습니다 — 헤롯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교체하라, 무거운 세금을 감면하라,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는 황금 독수리 사건으로 처형된 두 학자를 복권하고 그들을 죽인 자들을 처벌하라.
아르켈라오스는 가벼운 약속으로 달래려 했지만 군중이 격해져 시위가 확대되자 공포했습니다. 그는 유월절 첫날 아침 3,000명의 로마 병사를 성전 뜰에 투입했고, 일부 군중이 성전 지붕에서 돌을 던지자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3,000명이 죽었습니다(AJ 17.§213-218). 유월절 희생 제사가 실제 백성의 피로 물든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헤롯의 아들로서의 첫 행동"이라 냉소합니다. 아버지의 왕권이 아들에게 피로 물든 유산만 남긴 셈입니다.
"우리는 어떤 헤롯도 원하지 않습니다"
로마에서 후계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르켈라오스가 배를 타고 로마로 건너갔고, 갈릴리를 상속받기로 한 이복동생 안티파스와 살로메도 각자 자기 몫을 지키러 왔습니다. 안티파스는 자신을 전 왕국 후계자로 지목한 "더 오래된 유언장"을 근거로 내세웠고, 헤롯의 친척 대부분이 — 아르켈라오스가 너무 포악하다고 보아 — 안티파스 편에 섰습니다(AJ 17.§224-239).
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별도의 제3 사절단이었습니다. 유대 민중이 뽑은 50명의 대표단이 로마에 건너와, 그곳에 사는 유대인 8천 명의 지지 속에 아우구스투스 앞에서 연설했습니다(AJ 17.§300-314). 그들의 요구는 전례가 없었습니다. "황제여, 우리는 어떤 헤롯 왕가의 자손도 원하지 않습니다. 헤롯의 통치는 파라오조차 두려워할 만한 포악이었습니다. 차라리 우리를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들어 주시거나, 최소한 시리아 총독 아래의 자치 공동체로 만들어 주십시오 — 왕이 아닌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전통적 통치를 회복시켜 주십시오"(AJ 17.§304-314).
요세푸스는 이 연설을 길게 그대로 인용하는데, 그 자체가 제2성전 시대 유대 민중의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1차 자료입니다. 백성이 자기 왕조의 폐지를 황제에게 직접 청원한, 고대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세 명의 자칭 왕, 그리고 바루스의 전쟁
한편 요세푸스는 이 시기 유대의 혼란, 이른바 "바루스의 전쟁"도 상세히 기록합니다. 아르켈라오스가 로마에서 심의를 받는 동안 유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세 명의 "자칭 왕"이 동시에 등장했습니다.
첫째는 헤롯의 옛 노예 시몬으로, 큰 키와 왕가 노예 출신을 이용해 왕관을 쓰고 여리고의 헤롯 궁전을 불태웠습니다. 둘째는 양치기 출신 아트롱게스로, 네 형제와 함께 왕관을 쓰고 각자 부대를 지휘하며 로마 보급대를 공격했습니다(AJ 17.§273-285). 셋째는 갈릴리인 유다로 —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를 젊은 시절 헤롯이 처형한 바 있습니다 — 세포리스의 왕실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했습니다.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2개 군단과 4개 보조 부대를 이끌고 내려와 진압했습니다. 이 바루스가 바로 훗날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게르만족에게 3개 군단을 잃는 그 인물입니다. 세포리스는 불타고 주민은 노예로 팔렸으며, 엠마우스도 불탔습니다. 바루스는 예루살렘 주변에서 반란 가담자 2,000명을 십자가에 처형했는데(AJ 17.§295), 이는 한 번에 이뤄진 가장 대규모의 십자가형 기록 중 하나입니다.
왕국이 셋으로 나뉘다
아우구스투스는 팔라틴 궁전의 아폴로 신전에서 공식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한편에는 니콜라우스 다마스쿠스가 아르켈라오스를 변호하고, 다른 편에는 유대인 대표단과 안티파스의 변호인들이 섰습니다. 며칠의 심의 끝에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최종 유언을 대체로 승인하되 조건을 걸었습니다.
아르켈라오스에게는 "왕" 대신 "민족장"(에트나르크) 칭호만 주었습니다 — "그의 가치가 입증되면 왕으로 승격시키겠다"는 유보 조건이었습니다(AJ 17.§317). 영토는 유대·사마리아·이두매.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페레아의 분봉왕(테트라르크) 지위를, 필립에게는 이투레아·트라코니티스·골란·바타네아의 분봉왕 지위를 주었습니다. 살로메에게는 얌니아와 아스돗과 파사엘리스를 남겼습니다(AJ 17.§318-320).
아르켈라오스의 추방, 그리고 로마 직할로
아르켈라오스는 귀국 후에도 폭정을 이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을 제멋대로 갈아치우고, 두 번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 유대 율법을 공개적으로 어겼습니다(AJ 17.§339-341). 서기 6년, 10년의 통치 끝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전례 없이 합동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탄원해, 아르켈라오스를 갈리아의 비엔나(오늘날 프랑스 리옹 근처)로 추방시켰습니다(AJ 17.§342-344).
요세푸스는 추방에 앞선 흥미로운 꿈 해석도 기록합니다. 아르켈라오스가 "9개의 큰 이삭이 소 떼에게 먹히는" 꿈을 꾸자, 에세네파의 예언자 시몬이 "9개의 이삭은 9년을 뜻하며, 곧 당신의 통치가 끝날 것"이라 풀이했고, 정확히 5일 후 로마에서 소환령이 왔다고 합니다(AJ 17.§345-348).
아르켈라오스의 영토는 로마의 직할 속주로 편입되어 총독이 카이사레아에서 직접 다스렸습니다. 첫 총독 코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와 함께 인구조사를 실시하자, 이 조사가 갈릴리인 유다의 "제4철학" 반란을 촉발했습니다(AJ 17.§355-18.§10). 유대 왕국의 시대가 이렇게 사실상 끝났습니다. 다음 세대에 아그립바 1세가 서기 41~44년 잠시 왕위를 회복하지만, 그것은 3년의 일장춘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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