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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 형제가 세운 왕국 — 요세푸스가 전하는 하스몬 왕조의 영광과 피의 내리막

마카비 형제들이 얻어 낸 독립은 하스몬 왕조로 이어지지만, 한 세기 안에 왕권 경쟁과 가족 내 폭력으로 흔들립니다. 독립의 영광과 왕조의 균열을 함께 읽습니다.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읽기 조회 1

마카비 형제들이 셀레우코스 제국과 싸워 얻어 낸 독립이, 한 세기 만에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왕조의 비극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다룹니다. 영광과 피가 한 가문 안에서 교차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13권에서 하스몬 왕조의 전 과정을 — 외교가 요나단부터 마지막 평화의 여왕 살로메 알렉산드라까지 — 따라갑니다. 이 왕조의 부상과 분열은 곧 신약 시대 유대 종파의 무대를 만들어 냅니다.

외교로 얻은 독립 — 요나단과 시몬

유다 마카비가 BC 160년 엘라사 전투에서 전사한 뒤, 동생 요나단이 지도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군사력보다 외교를 무기로 쓴 지도자였습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왕위를 다투던 두 후보 — 정통 후계자 데메트리우스 1세와 도전자 알렉산더 발라스 — 가 서로 유대인의 지원을 얻으려 경쟁할 때, 요나단은 이들을 저울질하며 "누가 더 많이 주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데메트리우스가 세금 면제를 제안하자 알렉산더 발라스는 한술 더 떠 대제사장직 자체를 내밀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BC 152년 초막절에 처음으로 대제사장 의복을 입고 제사를 드렸습니다(AJ 13.§45-46). 200년간 사독 계열이 독점하던 대제사장직이 하스몬 가문으로 넘어간 결정적 순간이자, 한 가문이 군사 지도권과 종교 권위를 동시에 쥔 첫 사례였습니다.

요나단의 외교 수완은 로마와 스파르타에까지 닿았습니다. 그는 로마 원로원과의 동맹을 재확인했고, 놀랍게도 스파르타 왕에게 "우리와 스파르타인은 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근거로 형제 조약을 제안했습니다(AJ 13.§166-170). 요세푸스는 이 편지 원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지만 BC 143년, 셀레우코스의 새 섭정 트리폰이 우정을 가장해 요나단을 프톨레마이스(아코)로 초대한 뒤 호위병을 기습하고 그를 체포했습니다. 동생 시몬이 인질금 100탈란트와 두 아들까지 보냈지만, 트리폰은 돈만 받고 요나단을 끝내 살해했습니다(AJ 13.§187-212).

마지막 형제 시몬이 지도권을 이었습니다. 그는 트리폰과 전쟁 중이던 데메트리우스 2세로부터 조세 완전 면제를 확보해 사실상의 독립을 이뤘습니다 —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해(BC 142)부터 유대인은 이방의 멍에에서 벗어났고, 공식 문서가 '시몬의 첫 해'로 연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AJ 13.§213-214). 이듬해 시몬은 대집회에서 "대제사장이자 민족의 지도자(에트나르카)이자 장군(스트라테고스)"이라는 3중 칭호를 받았고, 이 직위는 "신실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 자손에게 세습되도록 정해졌습니다(AJ 13.§213).

어머니의 영웅적 외침

그러나 시몬조차 비참하게 끝납니다.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예리코 근처 도크 요새의 지휘관)가 시몬과 두 아들 유다·맛다디아를 자기 요새의 연회에 초대한 뒤, 숨겨 둔 부하들을 불러 세 사람을 모두 살해했습니다(AJ 13.§228-229).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몬의 아내까지 인질로 잡고 셀레우코스 안티오쿠스 7세에게 군대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시몬의 막내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예루살렘으로 먼저 달려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힐카누스의 어머니 — 자기 장모 — 를 성벽 위로 끌어내 위협했지만, 어머니는 "나 때문에 요새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공격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에 힐카누스는 공격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모친의 영웅적 자세"라며 극찬합니다(AJ 13.§230-235).

요한 힐카누스 — 세 가지를 받은 인물

힐카누스 시대에 하스몬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남쪽으로 이두매를 정복하고 주민 전체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 율법대로 살 것을 강요했습니다 — 거부하면 추방이었습니다(AJ 13.§257-258). 이 강제 개종이야말로 훗날 헤롯 대왕을 낳는 이두매인 안티파테르 가문을 "유대인"으로 만든 결정적 사건입니다. 북쪽으로는 사마리아인의 게리짐 산 성전을 파괴했고(AJ 13.§255-256, BC 128년경), 사마리아 시 자체도 1년 포위 끝에 함락시켰습니다(AJ 13.§275-281).

요세푸스에 따르면 힐카누스에게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 아들 안티고누스와 아리스토불루스가 사마리아 전투에 나선 날, 그가 성전에서 향을 사르다가 "내 아들들이 오늘 승리했다"는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이 정확히 같은 시각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AJ 13.§282, §299-300). 요세푸스는 "그는 대제사장직, 왕권, 예언의 은사 — 세 가지를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라 평가합니다.

13권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바리새인과의 결별입니다. 한 바리새인 엘르아살이 연회에서 힐카누스의 대제사장직 자격을 의심하자(그의 어머니가 안티오쿠스 시대 포로였다며), 힐카누스가 바리새인 전체와 갈라서고 사두개인 편에 섭니다(AJ 13.§288-298). 이 장면은 유대전쟁사에는 없고 고대사에만 있으며, 바리새-사두개 갈등의 기원 이야기 역할을 합니다(상세는 다음 편).

피가 피를 부르다 — 아리스토불루스와 얀나이오스

힐카누스가 죽은 뒤, 맏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유대인의 왕" 칭호를 처음으로 공식 사용했습니다 — 이전까지는 '대제사장'과 '에트나르카'에 만족했지만, 이제 정식 바실레우스(왕)였습니다(AJ 13.§301). 그러나 그는 권력을 지키려 어머니를 감옥에 가둬 굶겨 죽이고, 가장 아끼던 동생 안티고누스를 의심해 살해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극적으로 그립니다 — 아리스토불루스가 양심의 가책으로 병들어 쓰러졌고, 시종이 안티고누스가 흘린 피 위에서 미끄러지자 "피가 피를 부른다"고 외쳤다는 것입니다(AJ 13.§314-317). 그는 "내가 어머니와 형제의 피로 손을 씻었다. 나 같은 자가 살 권리가 있는가"라며 울다가 1년 만에 죽었습니다.

뒤를 이은 얀나이오스(알렉산드로스 얀나이오스)는 형수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해 왕위에 올랐습니다(AJ 13.§320). 영토를 헤르몬산에서 이집트 국경까지 넓혔지만, 초막절에 성전에서 제사하다가 백성이 던지는 에트로그(초막절 과일)에 맞는 모욕을 당했습니다(AJ 13.§372). 이후 6년간 바리새인과 내전을 벌이며, 반란이 진압된 뒤 800명을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AJ 13.§380-383). 요세푸스는 이를 "유대인도 이방인도 하지 않은 잔혹"이라 기록합니다.

마지막으로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9년간 평화를 지켰지만, 그녀가 BC 67년에 죽자 두 아들 —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 이 칼을 듭니다. 이 형제 다툼이 곧 로마를 유대로 불러들이는 14권의 내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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