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남유다 왕국이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는 보통 열왕기와 예레미야서로만 기억합니다. 그런데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유대 전쟁을 직접 겪고 로마로 넘어간 그가, 약 400년 전 조국의 멸망을 어떤 눈으로 보았는지가 흥미롭습니다.
그의 『유대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10권은 히스기야 이후부터 바빌론 포로기까지(BC 698~586)를 다룹니다. 성경 본문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그리스어 §(section) 번호로 자기 식으로 서술하면서 군데군데 후대 전승과 자신의 해석을 끼워 넣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 멸망을 "한순간의 사고"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인 결과"로 읽습니다.
므낫세가 쌓은 피, 요시야의 마지막 개혁
히스기야가 기도와 이사야의 예언으로 앗시리아의 재앙을 넘긴 뒤, 남유다는 한 세대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가 55년 동안 우상 숭배를 되살립니다. 요세푸스는 므낫세의 만행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 산당을 복구하고, 성전 안에 제단을 세워 별과 이방 신을 섬기고, 자기 아들을 불에 바치고, 점술과 주술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로 꼽은 건 의인 박해였습니다. "그가 날마다 예언자들을 죽여 예루살렘이 피로 넘쳤고, 이 피가 하나님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쌓았다"(AJ 10.§37-46). 후대 전승은 예언자 이사야가 므낫세 때 톱으로 켜여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다만 요세푸스는 므낫세가 말년에 앗시리아에 끌려갔다가 회개하고 돌아왔다고도 기록해, 짧은 회개의 흔적을 남겨 둡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2년 만에 신하들 손에 살해됐고, 그 아들 요시야가 여덟 살에 즉위했습니다. 요시야는 마지막 대개혁을 시도한 왕입니다. 스물여섯 살 되던 해, 성전 보수 공사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오래 방치돼 있던 율법서를 발견합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모세가 손수 기록하여 언약궤 옆에 두었던 원본 율법서"라고 적습니다(AJ 10.§57-58). 서기관 사반이 읽어 주자 요시야는 옷을 찢고 통곡하며 여예언자 훌다에게 뜻을 물었고, 훌다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임하나, 요시야 자신은 평화롭게 죽으리라"고 답했습니다(AJ 10.§59-66).
요시야는 백성을 성전에 모아 율법서를 낭독하고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이어 산당을 헐고, 우상을 불태우고, 금송아지가 있던 벧엘의 제단까지 부수고, 모세 이래 약 800년 만에 가장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AJ 10.§50-73). 요세푸스는 "요시야와 같은 왕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고 평합니다.
므깃도의 화살 한 발, 운명이 갈리다
그러나 평화는 짧았습니다. BC 609년, 이집트 파라오 네코 2세가 앗시리아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도우려고 북진하면서 유다 영토를 지나려 합니다. 네코는 요시야에게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길만 열어 달라"고 전갈을 보냈지만, 요시야는 통과를 막기로 결심하고 므깃도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일반 병사처럼 변장하고 싸우던 요시야가 이집트 궁수의 화살에 가슴을 맞았고, 예루살렘으로 후송됐으나 곧 숨을 거둡니다. 서른아홉이었습니다(AJ 10.§74-80).
요세푸스는 이 죽음을 "유다의 운명이 결정된 순간"으로 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요시야를 위해 애가를 지었으니, 오늘날 구약의 '애가'가 바로 그것이라고 전합니다. 개혁의 왕이 사라지자, 이후 네 왕은 모두 이집트나 바빌론의 꼭두각시로 전락합니다. 여호아하스는 3개월 만에 네코에게 폐위돼 이집트에서 죽었고, 그 형 여호야김이 네코의 꼭두각시로 즉위합니다. 그리고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론의 왕세자 느부갓네살 2세가 이집트군을 격파하면서, 동방의 주인이 바뀝니다. 이집트의 시대가 끝나고 바빌론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느부갓네살의 세 차례 침공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의 유다 침공을 세 차례로 나눠 정리합니다.
1차(BC 605)에는 여호야김이 곧바로 항복하고 바빌론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때 인질로 보낸 왕족 청년들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AJ 10.§84-87). 3년 뒤 여호야김이 이집트의 부추김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이 와서 그를 죽이고 시체를 성벽 밖으로 던졌습니다. 예레미야가 "그가 나귀같이 매장될 것"이라 예언한 그대로였다고 요세푸스는 적습니다.
2차(BC 597)에는 새 왕 여호야긴이 3개월 만에 항복하면서, 왕족·귀족·장인·군인 1만 명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 가운데 예언자 에스겔이 있었습니다(AJ 10.§98-102). 느부갓네살은 성전과 왕궁의 보물도 약탈해 갔습니다. 여호야긴은 바빌론 감옥에서 37년을 보낸 뒤, 훗날 새 왕에 의해 풀려납니다.
3차(BC 586)는 마지막입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처음엔 친바빌론파였지만 강경파에 떠밀려 이집트의 약속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이 18개월간 예루살렘을 포위한 끝에 성을 함락시키고, 솔로몬의 성전을 불태웁니다(AJ 10.§134-147). 다윗 왕조 400여 년의 성전이 잿더미가 된 순간입니다.
시드기야의 마지막과 예레미야의 외침
요세푸스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성벽 틈으로 밤에 도주했다가 예리코 평원에서 붙잡혔습니다.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간 그는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AJ 10.§139-141). 요세푸스는 여기서 흥미로운 관찰을 덧붙입니다. 에스겔이 일찍이 "시드기야는 바빌론을 보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죽으리라"고 예언했는데, 시드기야의 눈은 예리코에서 뽑혔으니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정말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던 두 예언이 동시에 성취된 셈입니다.
포위 내내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빌론에 항복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외쳤지만, 왕과 귀족들은 거부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예레미야가 "군사적 저항이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주장하다가 반역 혐의로 감옥과 진흙 구덩이에 갇혔다고 길게 기록합니다(AJ 10.§112-130). 학자들은 이 대목을 주목합니다. 요세푸스 자신도 AD 66~70년 유대 전쟁에서 로마에 항복하라고 외치다 반역자로 몰린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레미야를 자세히 그린 것은, 은연중 자신을 "제2의 예레미야"로 자리매김하는 의도적 병치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성전이 불탄 뒤에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총독 그달리야가 명절 잔치 중에 왕족 출신 이스마엘에게 살해됩니다. 남은 백성은 바빌론의 보복을 두려워해 예레미야의 만류에도 이집트로 도주했고, 예레미야도 강제로 끌려갔습니다(AJ 10.§154-185). 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마지막 예언을 남깁니다 — "이집트도 곧 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될 것이며, 너희도 칼과 기근으로 죽으리라." 그리고 그대로 이뤄졌다고 적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다윗 왕가의 마지막 흔적은 바빌론 감옥의 여호야긴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같은 바빌론에서, 한 청년이 다음 시대를 향한 다리를 놓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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