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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 왕이 무릎 꿇은 유대 율법 — 요세푸스가 전하는 70인역 번역 이야기

알렉산더 대왕 이후, 유대 율법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헬레니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다룹니다. 번역 사업, 디아스포라 유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정책이 함께 얽힙니다.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읽기 조회 1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유대 율법서가 세계 최대 도서관에 모셔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일은 이방의 왕이 비용을 부담하고, 유대인 포로 석방까지 동반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12권에서 이 사건을 자기 책 전체에서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자랑스럽게 풀어 놓습니다. 헬레니즘 세계 한복판에서 유대 율법이 어떻게 그리스어로 옮겨져 살아남았는지 — 그 70인역(셉투아긴타) 탄생의 현장으로 가 봅니다.

알렉산더 사후, 유대의 새 주인

알렉산더 대왕이 BC 323년 바빌론에서 32세에 갑자기 죽자 거대한 제국이 조각났습니다. 후계자 없이 떠난 자리를 두고 40년간 디아도코이 전쟁(후계자 전쟁)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장군들이 영토를 나눠 가졌습니다 —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는 셀레우코스, 마케도니아는 안티고노스, 트라키아는 리시마코스에게로요(AJ 12.§1-3).

유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첫 정복의 어두운 면도 빼놓지 않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속임수로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평화로운 사절단인 척 도시에 들어온 뒤, 유대인이 안식일에 무기를 들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그 날 도시를 장악했다는 것입니다(AJ 12.§4-6). 수많은 유대인이 이집트와 키레네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정책을 바꿔,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시민권과 종교적 특권을 내려 줬습니다.

도서관장의 한 가지 보고

요세푸스가 가장 공들여 쓴 장면은 BC 3세기 중엽 알렉산드리아 왕실 도서관에서 시작됩니다. 도서관장 데메트리오스 팔레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 "폐하의 명에 따라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고 있는데, 단 하나, 유대인의 율법서만 빠져 있습니다. 신성한 책인데 히브리 문자로 쓰여 있어 그리스인은 읽을 수 없습니다"(AJ 12.§12-15). 당시 도서관에는 이미 20만 권이 있었고, 데메트리오스의 목표는 50만 권이었습니다.

왕이 흥미를 보이자 데메트리오스는 한 가지 조언을 더 보탰습니다 — "이 일을 하기 전에, 폐하의 영토에 있는 유대인 포로 12만 명을 먼저 해방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예루살렘 대제사장이 호의로 응답할 것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받아들여 자기 비용으로 12만 명을 풀어 줬습니다. 노예 한 명당 20드라크마씩 주인들에게 보상해, 무려 460탈란트의 황실 자금이 들었습니다(AJ 12.§26-33).

72명의 학자, 72일의 번역

해방 칙령을 내린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예루살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사절단은 황금 식탁과 술잔, 그릇 등 100탈란트의 황실 선물을 가져갔습니다. 엘르아살은 이를 환영하며 12지파에서 6명씩, 모두 72명의 학자를 뽑았습니다 — 율법과 그리스어 양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AJ 12.§39-56).

72명이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왕은 직접 환영하며 7일간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학자들에게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 "왕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친구와 적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답에 매번 감탄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72개 문답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AJ 12.§57-86).

그 후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 앞 파로스 섬 — 유명한 등대 옆 — 에 격리됐습니다. 데메트리오스가 시설을 마련하고 필요한 모든 것을 댔습니다. 그렇게 72명이 72일 만에 모세오경 전체를 그리스어로 옮겨 냈습니다(AJ 12.§103-107).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말라

번역이 끝나자 데메트리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공동체를 모두 모아 그리스어 율법서를 처음으로 낭독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며 "이 번역에서 단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하지 말라"고 결의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책을 받자마자 율법의 지혜 앞에 머리를 숙였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합니다. 왕이 데메트리오스에게 물었습니다 — "왜 이전의 어떤 그리스 역사가도 이 신성한 책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데메트리오스의 답은 이랬습니다 — "신성한 책이라, 인간이 함부로 다루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AJ 12.§108-113).

이것이 바로 70인역(Septuagint, LXX)입니다. 후대 그리스어권 유대인의 성경이 됐고, 더 중요하게는 1세기 초기 기독교의 성경이 됐습니다. 신약 성경의 구약 인용 상당수가 이 70인역에서 왔습니다. 요세푸스가 이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분명합니다 — 유대 율법이 이방 왕에게 인정받았고, 그리스 학문 세계의 어엿한 일부가 됐음을 증명하려는 거였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변증의 기둥이었던 셈입니다.

토비야드 가문과 셀레우코스로의 전환

70인역 이야기를 마친 요세푸스는 토비야드 가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AJ 12.§154-236). 토비야드 가문은 요르단 동편의 부유한 유대 귀족으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궁정과 깊이 얽혀 있었습니다. 가문의 수장 요셉은 영리한 외교관이자 세금 청부업자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5세 시대에 시리아와 페니키아 전역의 세금 청부권을 따내 22년간 큰 부를 쌓았습니다(AJ 12.§175-185). 그의 아들 히르카누스는 더 화려한 행적을 남겨, 알렉산드리아 궁정에서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황실 동물의 귀를 잘라 선물하는 기괴한 일화까지 전해집니다(AJ 12.§210-222).

이 가문 이야기는 단순한 가십이 아닙니다. 친프톨레마이오스와 친셀레우코스로 갈린 유대 내부의 분열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BC 198년, 안티오쿠스 3세(셀레우코스)가 파니온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결정적으로 꺾으면서 유대는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넘어갔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처음엔 무척 관대했습니다. 유대인이 성문을 열어 환영한 데 감격해 세금 감면, 성전 보수 지원, 율법대로 살 권리를 약속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칙령 원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AJ 12.§138-146):

"왕 안티오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인사를 보낸다. 유대인이 우리 군대를 환영했고, 우리가 도시에 들어갔을 때 화려한 영접을 했으며,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고 코끼리 부대까지 도왔으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보상한다: 성전 보수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면세로 공급하며, 사제와 서기관과 성전 가수와 성전 지킴이는 모든 세금에서 면제한다…"

이 칙령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법적 권리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핵심 문서입니다. 요세푸스에게 이런 원문 인용은 변증 작업의 심장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관대함은 한 세대 만에 끝납니다. 안티오쿠스 3세의 손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BC 175년에 즉위하면서, 마카비 혁명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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