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세기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한복판에 이방의 신상이 세워지고, 돼지가 제물로 바쳐지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굴욕에 맞서 한 산골 제사장 가문이 일어섭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고대사』(Antiquitates Judaicae) 12권 후반에서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와 마카비 항쟁, 그리고 오늘날 유대인이 지키는 하누카 축제의 기원을 자세히 들려줍니다. 다니엘서의 예언과도 맞물리는 이 격동의 시대로 가 봅니다.
대제사장직이 경매에 부쳐지다
BC 175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셀레우코스 왕좌에 올랐습니다. 비극의 출발점은 대제사장직의 부패였습니다. BC 175년 이후 대제사장직이 사실상 뇌물 경매 물건이 됐습니다. 합법적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해임되고, 그의 동생 야손이 안티오쿠스에게 더 많은 돈을 약속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AJ 12.§237-241).
야손은 한 발 더 나아가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김나지움(체육관)을 짓고, 유대 청년들이 헬레니즘 풍습을 받아들이도록 부추겼습니다. 곧 메넬라오스라는 더 부유한 인물이 같은 방식으로 야손을 몰아냈습니다. 정통 사독 계열의 오니아스 4세는 이집트로 피신해, 훗날 그곳에 오니아스 성전을 세우게 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
이집트 원정에 실패한 안티오쿠스는 BC 168년 — 로마 사절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이집트 모래 위에 원을 그어 "이 원에서 나가기 전에 답하라"고 강요했던 그 굴욕을 당한 직후 — 분노에 차서 귀로에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BC 167년에 일어납니다. 그는 성전에 이른바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웠습니다.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이었고, 그 위에 돼지가 제물로 올랐습니다(AJ 12.§248-255).
안식일 준수, 할례, 율법서 소유는 모두 사형이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박해는 끔찍했습니다. 율법서 두루마리는 찢겨 불태워졌고, 시민들은 매월 왕의 생일에 강제로 돼지를 먹어야 했습니다(AJ 12.§256-264). 요세푸스는 이 박해를 다니엘서 8장의 "작은 뿔" 예언이 이뤄진 것으로 봅니다. "다니엘은 안티오쿠스의 박해가 정확히 3년 후에 끝날 것을 미리 보았는데, 그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적습니다(AJ 12.§322).
모디인의 봉기
봉기는 모디인이라는 평범한 산골 마을에서 시작됐습니다. 제사장 맛타티아스는 다섯 아들 —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 — 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왕의 관리가 마을에 와서 이교 제사를 강요했을 때, 한 유대인이 먼저 나서서 제단 앞에 섰습니다. 맛타티아스는 그 배교자를 제단 위에서 쓰러뜨리고, 이어서 왕의 관리 아펠레스까지 쳤습니다(AJ 12.§268-272). 그리고 외쳤습니다 — "여호와의 율법을 위해 열심인 자는 나를 따르라!" 다섯 아들과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산에서 맛타티아스는 결정적인 선택을 내립니다. 안식일에도 공격받으면 저항하라는 결정이었습니다. 이전에 안식일을 지키려 동굴에 숨었다가 저항도 못 한 채 학살당한 1천 명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AJ 12.§274-277). 율법 자체가 자기 보존을 허용한다는 이 신학적 정당성은 마카비 혁명을 가능하게 한 사상의 전환점이었고, 훗날 정통 유대 군사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1년 뒤 맛타티아스가 죽고, 가장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망치")가 혁명을 이끌게 됩니다.
유다 마카비와 성전 정화
유다 마카비는 셀레우코스 정규군을 잇달아 격파했습니다. 처음엔 작은 게릴라전이었지만 점차 정규 전투로 발전했습니다. 엠마오에서는 고르기아스 장군의 야간 기습 정보를 미리 입수해 적진을 먼저 쳤고, 벳 호론 고개에서는 세론의 군대를 깨뜨렸습니다. 이듬해엔 섭정 리시아스가 직접 이끄는 6만 5천 대군과 벳수르에서 마주쳤는데,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다의 병력은 1만에 불과했습니다(AJ 12.§313-315). 유다는 "수가 적다고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적은 수로도 큰 무리를 이기실 수 있다"고 외치며 정면 돌격해 이겼습니다.
BC 164년 12월, 유다는 마침내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 산에 들어갔습니다. 이방 제단을 망치로 부수고, 더럽혀진 성전 기구는 모두 폐기한 뒤 새로 만들었으며, 제단을 헐어 새 돌로 다시 쌓았습니다(AJ 12.§316-322). "성전이 황폐해진 지 정확히 3년, 같은 날에 제사가 다시 드려졌다 — 안티오쿠스의 가증한 행위가 시작된 바로 그 날짜에"라고 요세푸스는 적습니다(AJ 12.§319-322). 8일간의 축제가 이어졌고, 매년 같은 날 반복하도록 정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누카입니다.
요세푸스는 이 축제를 "빛의 축제"(Φῶτα, Phōta)라 부르며 그 이름의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이 자유가, 우리가 감히 기대하지도 못했을 때 빛처럼 비추었기 때문이다"(AJ 12.§325). 흥미롭게도 그는 후대에 유명해진 "기름 하루 분량이 8일간 탔다"는 기적 전승은 적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더 나중에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완의 승리, 그리고 형제들
유다의 승리는 아직 미완이었습니다. 셀레우코스의 새로운 침공이 이어졌고, 유다는 BC 160년 엘라사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시신은 동생들이 거두어 모디인의 가족 무덤에 묻었습니다.
가장 외교적이었던 동생 요나단이 지도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셀레우코스 왕위를 다투던 두 후보 — 데메트리우스 1세와 알렉산더 발라스 — 사이를 줄다리기하다가, BC 152년 초막절에 처음으로 대제사장 의복을 입었습니다. 200년간 사독 계열이 독점하던 자리가 마침내 하스몬 가문으로 넘어간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AJ 12.§413-419). 마지막 형제 시몬은 BC 142년 셀레우코스로부터 완전한 조세 면제를 얻어 내며 사실상의 독립을 이뤄 냅니다(AJ 12.§434).
마카비 다섯 형제 가운데 네 명이 전쟁터에서, 또는 정치 음모로 죽었습니다. 하스몬 왕조는 그 무덤 위에 세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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