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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법정에 없었다 — 헤롯이 두 아들을 정죄한 베이루트 재판

지난 편에서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중재로 두 아들과 잠시 화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화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부터 다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6권은 이복형 안티파테르의 모함이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결국 두 왕자가...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읽기 조회 1

지난 편에서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중재로 두 아들과 잠시 화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화해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부터 다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6권은 이복형 안티파테르의 모함이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결국 두 왕자가 재판정에 서지도 못한 채 정죄되는지를 기록합니다.

이번 편은 그 마지막 장면, 곧 베이루트(베리투스) 재판입니다. 한 아버지가 로마 법정의 형식을 빌려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고대 궁정 정치의 가장 차가운 단면입니다.

화해는 왜 무너졌나

기원전 12년경 아퀼레이아에서 아우구스투스가 헤롯과 두 아들 알렉산더·아리스토불루스를 나란히 앉혀놓고 화해를 주선했을 때, 두 형제가 아버지의 발 앞에 엎드려 울자 헤롯도 함께 울었고 참석자 모두가 감동했습니다(AJ 16.§91-129).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부터 이복형 안티파테르가 다시 음모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안티파테르 3세는 헤롯의 장남이었지만 비하스몬계 아내 도리스의 소생이라 지위가 낮았습니다. 마리암네의 아들들이 공식 후계자로 올라설 기미가 보이자 — 알렉산더는 카파도키아 왕 아르켈라우스의 딸 글라피라와, 아리스토불루스는 살로메의 딸 베르니케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 그는 필사적으로 모함을 펼쳤습니다. "두 왕자가 어머니 마리암네의 처형에 복수하려 합니다. 그들은 밤에 모여 '왕이 된 후 당신을 처형하고 아버지의 시신을 부관참시하겠다'고 말했습니다"라는 거짓 보고를 헤롯의 귀에 독처럼 부었습니다(AJ 16.§78-86). 안티파테르는 자기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로마로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편지로 원격 음모를 이어갔습니다.

조작된 두 가지 증거

결정적 "증거"로 조작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알렉산더가 아끼던 스파르타 출신 인물 에우리클레스가 끼어든 일이었습니다. 에우리클레스는 양쪽을 오가며 한쪽에서는 "알렉산더가 아버지를 죽이려 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내가 당신 편에 서겠다"고 맹세하며 돈을 긁어모으는 이중 첩자였습니다(AJ 16.§300-320). 후대에 이 증거가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헤롯을 격분시켰습니다.

둘째는 헤롯의 이발사 트리폰까지 심문에 동원된 일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트리폰은 고문 중에 "알렉산더의 친구 한 명이 나에게 와서, 왕께서 면도하는 순간에 목을 베게 해달라고 큰 선물로 부탁했다"고 거짓 자백했습니다(AJ 16.§387-389). 이 자백으로 헤롯의 편집증은 완성됐습니다. 알렉산더의 보호자 300명이 고문을 받고 처형됐고(AJ 16.§315-320), 수사는 카파도키아와 스파르타까지 확대됐습니다.

중립 도시 베이루트, 그러나 빈 피고석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의 허가를 받아 기원전 7년경 베이루트(베리투스)에서 정식 재판을 열었습니다(AJ 16.§356-367). 베이루트는 로마 퇴역병이 정착한 자치 식민도시로, 재판의 공정성을 상징하는 중립 지역이었습니다. 법정에는 150명의 배심이 참여했습니다. 로마 시리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세 아들이 배석했고, 페다니우스와 볼룸니우스 같은 황제 감찰관들, 헤롯의 친척과 친구들, 그리고 인근 도시의 명사들이 자리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 본인은 법정에 출석하지 못했습니다. 헤롯이 두 왕자가 직접 법정에 서서 변론하면 마리암네를 닮은 아름다운 용모와 설득력 있는 말투로 동정심을 얻을까 두려워, 시돈 근처 작은 마을 플라타네에 가둬둔 것입니다(AJ 16.§361). 피고가 자기 재판에 없는 재판이었습니다. 두 왕자는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검사가 된 아버지

헤롯이 직접 검찰 역할을 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격렬하고 감정적인" 고발을 했는데, 증거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이 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보라"는 식의 분노한 호소에 가까웠습니다. 요세푸스는 "그는 아버지로서 슬픔을 가장했으나, 사실은 왕으로서의 분노가 앞섰다"고 통찰합니다(AJ 16.§361-365).

헤롯의 수석 고문 니콜라우스 다마스쿠스가 증거를 나열하며 보충 변론을 했습니다. 그는 다마스쿠스 출신의 스토아 철학자이자 헤롯의 궁정 역사가였는데, 요세푸스가 16~17권을 집필할 때 주요 사료로 삼은 바로 그 인물입니다. 즉 우리가 읽는 이 비극의 상당 부분은, 헤롯 편에 섰던 사람의 기록을 요세푸스가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판결은 갈렸습니다. 사투르니누스 총독은 "유죄는 분명하나 사형은 과하다. 나 자신도 아들 셋을 둔 아버지이기에, 아들을 죽이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안다. 감금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고, 그의 세 아들도 동조했습니다(AJ 16.§367). 그러나 황제 감찰관 볼룸니우스가 사형에 강경 찬성했고, 나머지 배심 대부분도 사형에 동의했습니다. 헤롯이 직접 검사였으니 배심관들이 왕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겠습니다. 요세푸스는 볼룸니우스 한 사람의 투표가 균형을 결정했다고 기록합니다.

사랑이 맺어진 곳에서 졸려 죽다

두 왕자는 사마리아의 세바스테로 끌려가 교살됐습니다(AJ 16.§392-394). 세바스테는 "아우구스투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름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시는 30년 전 헤롯이 그들의 어머니 마리암네와 결혼식을 올린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사랑이 맺어진 곳에서 그 사랑의 열매가 졸려 죽은 셈입니다.

시신은 알렉산드리움 요새에 묻혔습니다. 이곳은 두 왕자의 외증조부 알렉산더 얀나이오스가 건설하고 증조부 알렉산더가 매장된 곳이었습니다. 하스몬 왕족의 마지막 두 혈통이 조상의 무덤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길게 남깁니다(AJ 16.§395-404). 그는 이를 "하나님의 저주가 한 가문에 어떻게 임하는지 보여주는 예"라며, 헤롯의 죄 — 하스몬 왕족의 말살과 마리암네의 처형 — 가 결국 자기 자녀에게 돌아왔다고 기록합니다. "헤롯의 삶은 끝까지 행복하지 못했다. 왕좌와 권력과 재물은 그의 손에 있었으나, 가정의 평화는 한 번도 그에게 없었다. 그는 자기 침대의 적과 싸우다 결국 자기 자녀를 죽인 것이다." (이 신적 심판 해석은 사료를 남긴 요세푸스 본인의 관점이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헤롯의 돼지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논평했다고 전해집니다. 유대인 헤롯이 돼지는 먹지 않으니 돼지는 살고 아들은 죽었다는, 그리스어 발음의 언어유희입니다. (다만 이 일화는 요세푸스 원문에는 없고 5세기 마크로비우스의 Saturnalia 2.4.11에 실려 있습니다.)

안티파테르 3세는 이복형제를 제거하고 유일한 후계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의 표적은 아버지 헤롯 자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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