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년 여름의 어느 오후, 로마의 한 정원에서 늙은 원로원 의원이 분수 옆에 무릎을 꿇었어요. 방금 자기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바닥에 받아 대리석 바닥에 뿌리며 한 문장을 말했습니다 — libate Liberi Patri sanguinem, "자유의 신께 이 피를 헌주하라."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곁에 선 젊은 사위에게 단 한 가지만 물었어요. 우리 중 몇이 남았느냐.
타키투스(Tacitus)는 그 문장을 적었고, 곧이어 『연대기』(Annales)의 펜 자체가 끊어집니다. 16권 35장 마지막 줄 뒤로 2천 년 동안 아무 글자도 따라오지 않았어요. 트라세아의 죽음과 타키투스의 본문이 같은 문단에서 함께 끝나는 거예요. 한 원로원 의원의 양심이 어떻게 한 시대의 마지막 문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침묵의 여백에서 전혀 다른 순교 이야기가 어떻게 번져 나갔는지 — 그 이야기를 해볼게요.
침묵이 곧 연설이었던 사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Publius Clodius Thrasea Paetus) — 파타비움(Padua) 출신, AD 56년 보궐 집정관을 지낸, 무소니우스 루푸스 학맥의 스토아 원로원 의원이었어요. 나이는 쉰 남짓이었습니다. AD 59년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살해한 뒤 원로원이 그 추모 결의안을 낭독하던 날, 트라세아는 회의장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어요. 그 뒤로 7년, 그는 원로원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위험을 말하면 그는 짧게 답했다고 타키투스는 전해요 — 자기 몸짓 하나에 공화국의 마지막 문장이 들어 있으니 그 문장을 취소할 마음은 없다고요. 그의 저항은 행동이 아니라 부재로 이뤄졌습니다. 7년간의 원로원 결석, 아그리피나·포페아·클라우디아 신격화 의식의 연속 불참, 그리고 자택에서 친구·제자와 나누는 철학 대화만 남긴 침묵. 공개 비판은 한 마디도 없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 네로에게는 말로 된 비판보다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트라세아의 부재가 곧 권위의 부정을 뜻했으니까요. 침묵 자체가 연설이었던 거예요.
침묵을 반역으로 만든 고발장
AD 66년 봄, 고발자 두 명이 황제 앞에 섰어요. 코수티아누스 카피토(Cossutianus Capito) — 전 킬리키아 총독이자 탄핵 전력이 있는 탐관, 티겔리누스의 사위였습니다. 그는 7년 전 자신을 탄핵으로 제명시킨 트라세아에게 묵은 원한이 있었어요. 그리고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Eprius Marcellus) — 전 리키아 총독으로, 웅변으로 원로원을 휘어잡던 밀고의 거장이 고발에 동조했습니다.
카피토의 고발장(Ann. 16.22)은 다섯 항목으로 정돈돼 있었어요. 7년간의 원로원 결석, 아그리피나 추모 회기 퇴장, 디바 포페아 신격화 불참, 자택의 철학 집회, 그리고 가장 길었던 다섯 번째 항목 — 트라세아의 침묵 자체가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 진술이 없는 자는 정치를 거부한 자가 아니라 다른 정치를 준비하는 자라는 논리였어요. 카피토는 네로에게 "이 도시에 이제 세 이름만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 카토, 브루투스, 그리고 트라세아라고요. 타키투스는 이 대목에서 평소의 중립 자세를 깨고 직접 단죄해요 — 네로가 virtutem ipsam excindere concupiscens, "덕성 자체를 제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고요(16.22). 그가 없애려 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 덕성의 가능성 자체였던 거예요. 네로는 고발을 승인했습니다.
회의 날, 친위대 병력이 회의장 주변 전 구획을 봉쇄했어요(16.27). 계단에도, 카스토르 신전 앞에도, 포룸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에도 무장 병사가 섰습니다. 의원들은 그 사이를 지나 자리에 앉았어요. 트라세아에게는 참석이 금지됐습니다 — 피고인 없는 재판이었죠. 연좌로 기소된 사람도 있었어요. 트라세아의 친구 바레아 소라누스(Barea Soranus)와 그의 딸 세르빌리아(Servilia)였습니다. 세르빌리아는 점성술사에게 아버지의 운명을 물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그녀의 답이 16.32에 남아 있어요 — 아버지의 안녕 외에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고요. 원로원은 그 답을 듣고도 만장일치로 부녀를 함께 사형에 처했습니다. 세 명의 사형이 한 회기의 같은 찬성 투표로 확정됐어요. 원로원이 자기 기능의 마지막 장면을 스스로 연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두 개의 정원, 같은 책
판결이 자택에 전해지던 오후, 트라세아는 정원에 있었어요. 사위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Helvidius Priscus) — 훗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처형될 그 인물, 그러나 이 순간엔 서른 몇 살의 원로원 신인 — 가 곁에 앉아 있었고, 키니코스 철학자 데메트리오스(Demetrius the Cynic)도 초대돼 있었습니다. 손님은 적었고 대화는 길었어요. 타키투스는 16.34에서 그 대화가 영혼의 본성과 육체로부터의 분리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고만 적어요 — 플라톤의 『파이돈』이죠.
한 해 전 AD 65년 봄, 세네카도 노멘툼의 작은 별장에서 같은 책을 입에 담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트라세아의 정원에서 같은 장면이 한 번 더 벌어지고 있었어요. 타키투스는 이 반복을 따로 주석하지 않습니다. 다만 두 정원을 같은 한 해 안에 나란히 세워 둘 뿐이에요. 판결의 전령으로 부속관(quaestor)이 도착해 원로원이 죽음의 방식을 자유롭게 고르도록 허락했다는 공식 문구만 읽었습니다 — liberum mortis arbitrium. 트라세아는 일어나 헬비디우스에게 몸을 돌렸어요. 노인은 사위에게 자기를 보고 울지 말라고, 너는 아직 젊으니 너의 시대를 조심하라는 마지막 교훈을 남겼습니다(16.35). 헬비디우스는 울지 않았어요. 스승이자 장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8년 뒤 AD 74년, 그 자신도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같은 종류의 문장을 반복하게 됩니다.
자유의 신께 이 피를
트라세아는 정원 안쪽 분수로 걸어갔어요. 의사가 칼을 준비했고, 양쪽 팔목의 정맥이 한 번에 절개됐습니다 — utrasque arterias rumpit. 세네카가 노쇠한 몸 때문에 실패했던 그 지점을, 트라세아는 단호한 자세로 통과했어요. 피가 제대로 흐르자 노인은 손바닥을 뻗어 거기에 몇 방울을 받아 정원 바닥에 뿌리며 한 문장을 말했습니다 — libate Liberi Patri sanguinem, "자유의 신께 이 피를 헌주하라."
라틴어 Liber Pater는 박쿠스(Bacchus)의 이름이자 "자유로운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소리 한 글자 차이로 이 이름은 libertas, 즉 "자유" 자체로 옮겨집니다. 세네카가 1년 전 유피테르 리베라토르(Jupiter Liberator)에게 목욕물 한 손을 헌주했던 장면과 이 헌주는 같은 자리에 놓여 있어요. 다만 세네카의 헌주가 그리스 철학자의 로마 판이었다면, 트라세아의 헌주는 로마 공화국이 마지막으로 자기 신을 부른 순간이었습니다. 원로원은 그날 아침 만장일치로 자기 자신을 처형했고, 트라세아는 오후에 그 시신에서 피 한 모금을 떠 자유의 신에게 되돌린 거예요.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곁에 있던 사람들을 한 번에 둘러보며 한 가지만 더 물었습니다 — quotus quisque reliquus, "우리 중 몇이 남았느냐." 대답은 없었어요. 타키투스도 그 자리에 대답을 적지 않습니다. 질문 자체가 부음이었어요. 세네카가 AD 65년 봄에, 페트로니우스가 AD 66년 봄에 죽었고,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유배됐고, 실라누스 토르콰투스가 자살을 강요받았고, 바레아 소라누스와 세르빌리아가 같은 회기에 사형을 받았고, 이제 트라세아가 정원 바닥에 피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한 세대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토아 원로원의 마지막 사람이 자기 뒤를 돌아보며 숫자를 세고 있었던 거예요. 그 물음은 헬비디우스에게 간 게 아니었습니다 — 헬비디우스는 아직 살아 있었으니까요. 질문은 헬비디우스 너머,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로 갔어요.
펜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 또 다른 순교
피가 다 빠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타키투스는 적지 않아요. 16권 35장의 마지막은 "그렇게 그는 죽었다"에 해당하는 짧은 라틴 결구로 끝납니다. 다음 장, 16권 36장은 존재하지 않아요. 고대 후기의 어느 필사본 전승 과정에서 트라세아의 처형부터 네로의 자살까지 약 2년간의 서술이 완전히 소실됐고, 그 뒤로 다시는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는 타키투스 『연대기』는 한 원로원 의원이 정원에서 "우리 중 몇이 남았느냐"고 묻는 문장 뒤에서 백지로 바뀌어요. 본문이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질문 뒤에서 본문 자체가 멈추는 거예요.
그 침묵의 여백을 잠시 들여다보면, 트라세아의 양심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는 AD 74~75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처형됐고, AD 93년에는 도미티아누스가 트라세아 전기를 쓴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Arulenus Rusticus)와 헬비디우스 전기를 쓴 헤렌니우스 세네키오(Herennius Senecio)를 처형합니다. 두 사람의 죄는 단 하나, 책을 썼다는 것이었어요. 두 권은 공개 광장에서 불태워졌습니다. 타키투스는 몇 해 뒤 장인 아그리콜라의 전기 첫 장에서 이 사건을 돌아보며(Agricola 2), 그 불로 "로마 인민의 목소리와 원로원의 자유와 인류의 양심"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그들이 믿었노라 적어요. 트라세아 → 헬비디우스 → 아룰레누스·세네키오로 이어진 45년 세 세대의 스토아 저항 계보가, 그 계보를 기록하는 타키투스 자신의 페이지 위에서 닫힌 거예요. 그 페이지를 쓰는 손이 네 번째 세대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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