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5년에서 66년으로 넘어가는 로마, 네로의 숙청은 멈출 줄 몰랐어요. 피소 음모가 발각된 뒤 원로원 귀족들이 줄줄이 자살을 강요받던 그 무거운 계절에, 한 사람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었습니다. 울지도, 황제에게 아첨하지도, 철학을 읊지도 않았어요. 그는 죽음마저 평소의 저녁 식사처럼 치렀습니다.
타키투스(Tacitus)가 『연대기』(Annales) 16.18에서 단 한 단어로 새겨 넣은 사람 — elegantiae arbiter, "우아함의 심판관"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의 이야기예요. 같은 봄에 죽은 세네카가 소크라테스를 흉내 냈다면, 페트로니우스는 그 비장함조차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서판 위에, 자기를 죽인 황제의 취향을 거꾸로 심사해 놓고 떠났죠.
우아함의 심판관
네로의 궁정에는 모든 연회를 심사할 권리를 가진 단 한 사람이 있었어요. 어느 포도주가 어느 계절에 어울리는지, 어느 비단이 어느 램프 빛에서 가장 살아나는지, 어느 시가 식탁 끝에서 낭송될 만하고 어느 시가 침묵 속에 묻혀야 하는지 — 그 판정이 모두 페트로니우스 한 사람에게 맡겨져 있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를 elegantiae arbiter, "우아함의 심판관"이라 불렀어요(Ann. 16.18). 네로가 무엇을 아름답다 여길지는 네로 자신이 아니라 페트로니우스가 먼저 결정했던 거예요.
그의 이력은 로마 귀족 사회에서도 드문 역설이었습니다. 비티니아 총독을 지냈고 로마에서 보궐 집정관(consul suffectus)으로 일한 유능한 행정가였어요. 그런데 타키투스는 그가 공직에서도 "일에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일에마저 그 특유의 무심한 품격을 그대로 옮겨 놓은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했으며, 다른 이들이 근면으로 얻는 명성을 그는 나태로 얻었다고요(16.18). 궁정의 모든 방탕은 그의 승인을 거쳐야 비로소 "세련된" 것이 되었습니다.
적은 더 고상한 자를 견디지 못한다
문제는 그 위치 자체가 적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친위대장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Ofonius Tigellinus)는 네로의 귀를 두고 페트로니우스와 경쟁해 왔고, 자기보다 고상한 자가 황제 곁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AD 65년 피소 음모의 발각이 연쇄 숙청을 낳자, 티겔리누스는 그 파도에 페트로니우스의 이름을 함께 실어 보낼 기회를 노렸어요.
매수된 노예 하나가 페트로니우스와 음모자 스카이비누스(Scaevinus)의 친분을 증언했습니다. 변론은 허락되지 않았어요. 페트로니우스의 집에 있던 노예 대부분은 이미 체포되어 심문을 기다리고 있었죠. 때는 AD 66년 봄, 네로가 그리스 순회를 준비하느라 궁정을 이끌고 캄파니아 해안에 내려와 있던 시기였어요. 페트로니우스는 황제 일행을 따라 쿠마에(Cumae)까지 내려왔다가 거기서 발이 묶입니다. 도시를 떠나는 것도, 재판을 기다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도 않았고요.
묶었다 풀기를 반복한 정맥
그가 고른 방법은 평범했어요 — 정맥 절개. 그러나 거기에 입힌 형식은 로마사에 기록된 어느 자살과도 닮지 않았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혈관을 그었고,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곧 붕대로 다시 묶었어요. 얼마 뒤 붕대를 풀어 다시 흐르게 했고, 또 묶었습니다.
타키투스는 이 반복을 절제 없이 기록해요 — incisas venas, ut libitum, obligatas aperire rursum, "정맥을 절개하고, 기분에 따라, 묶은 것을 다시 풀었다"(16.19). 그는 피가 자신을 두고 서두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녁이 오고, 식탁이 차려지고, 친구들이 모였어요.
연회는 평상시대로 흘러갔습니다. 다른 집의 저녁 식사와 구분할 표지가 하나도 없었어요. 페트로니우스는 누워서 친구들과 이야기했고, 노예들에게는 여느 날처럼 꾸짖을 일을 꾸짖고 칭찬할 일을 칭찬했습니다. 누군가는 매를 맞았고 누군가는 상을 받았어요. 대화의 주제까지 미리 골라 두었습니다. 영혼의 불멸을 논하지 않았고 철학자들의 격언을 인용하지도 않았어요. 세네카가 한 해 전 소크라테스의 『파이돈』을 로마 판으로 재현하며 죽었다면, 페트로니우스는 그 장르를 정중히 거부했죠. 대신 경쾌한 시를 낭송하고 농담을 들었습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 — 그게 우아함의 심판관이 자기 죽음에 매긴 최종 판정이었어요.
황제의 취향을 심사한 마지막 서판
밤이 깊고 피가 식어 가는 동안, 그는 한 가지 일을 더 처리했어요. 침대 곁에서 서판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이 자살 직전 황제에게 바치던 찬양과 아첨의 문서, 그 의례적 부음(附音)을 페트로니우스는 거부했어요. 대신 전혀 다른 종류의 문서를 구술했습니다 — 네로의 사적 방탕에 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록이었어요. 정부의 이름들, 남색 파트너의 이름들, 궁정 뒤편에서 벌어진 기괴한 행위들, 장소와 시간과 동반자의 목록까지요.
타키투스는 세부를 옮기지 않지만, 네로가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짧게 기록해요 — 황제는 이 리스트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실리아(Silia)라는 여성까지 포함된 것을 보고 소스라쳤다고요(16.20). 페트로니우스는 자기 인장 반지(signum)를 서판에 찍어 봉인했습니다. 그리고 봉인 직후 그 반지를 부숴 버렸어요 — 자기 인장이 다른 누군가의 위조 문서에 쓰이지 않도록요.
서판은 네로에게 보내졌습니다. 황제 단 한 사람이 열고 읽도록요. 그게 페트로니우스가 제국의 우아함의 심판관으로서 남긴 마지막 평결이었어요. 궁정 연회의 취향을 심사해 온 사람이, 생애의 마지막 서판에 황제의 취향을 심사해 놓고 떠난 셈이죠. 세네카가 "내 생애의 초상"(vitae meae imaginem)을 친구들에게 말로 남겼다면, 페트로니우스는 네로의 생애의 초상을 밀랍 서판 위에 사실의 목록으로 남겼습니다.
손님이었다가 시체가 된 사람
페트로니우스는 잠들 듯 숨을 거뒀어요. 정확한 시점을 타키투스는 적지 않습니다 — 연회가 끝났는지, 손님들이 떠났는지, 혈관을 마지막으로 풀어놓은 게 언제였는지요. 그 모호함 자체가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이었어요. 다른 로마인들은 죽음을 공적인 장면으로 만들어 원로원에 바쳤지만, 페트로니우스는 죽음을 사적인 저녁 식사처럼 진행해, 어느 순간까지 손님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시체였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거든요. 의사도, 철학자도, 사제도 그의 곁에 없었습니다.
타키투스가 그의 부음을 길게 기록한 뒤 역사에 새겨 넣은 단어는 결국 elegantiae arbiter 하나였어요. 그 단어 앞에는 경멸이 없고 뒤에는 애도가 없습니다. 네로의 궁정에 "세련"이라는 개념을 세워 놓은 사람이, 그 궁정의 마지막 세련된 문장을 쓰고 사라진 거예요.
여기서 이 죽음의 로마사적 무게를 짚어 둘 만해요. 타키투스의 부음 수사학에서 페트로니우스의 자살은 흔히 에피쿠로스적 풍자 변형(Epicurean variant)으로 읽힙니다. 같은 1년 반 사이에 스토아 원로원의 세 거두가 연달아 자살했거든요 — AD 65년 봄 세네카, AD 66년 봄 페트로니우스, 그리고 AD 66년 여름 트라세아 파이투스. 세네카는 혈류가 모자라 약물과 뜨거운 욕조까지 동원한 끝의 불완전한 스토아였고, 트라세아는 정원과 헌주와 계승자를 갖춘 완성된 스토아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페트로니우스는 평상시 연회를 유지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 자체를 지워 버린 풍자가였어요. 타키투스는 이 세 죽음을 나란히 세워, 네로 시대 귀족 자살의 양 극단을 한 폭에 담아냅니다. 페트로니우스가 세네카와 같은 봄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 뒤, 네로의 궁정에는 더 이상 "고상하다"는 판정을 받을 자격을 가진 사람이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해 여름, 또 한 사람의 원로원 의원이 같은 숙청의 파도 속에서 자기 정원의 문을 닫습니다 — 다만 그의 식탁에는 농담 대신 헌주가, 경쾌한 시 대신 자유의 신(Liber Pater)의 이름이 오르게 돼요.
다음 편은 같은 권의 자유의 신에게 바친 피, 트라세아 파이투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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