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년, 한 재판이 로마를 사로잡았어요.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독살했다는 혐의로 시리아 총독 피소가 원로원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이 오늘날 세계 고전학에서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같은 사건을 두 번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한 번은 타키투스(Tacitus)의 문장으로 — 서기 115년경, 은퇴한 전직 집정관이 95년 전 재판의 회의록을 라틴어 산문으로 다시 깎아 새긴 판본입니다. 또 한 번은 스페인 남부의 한 들판에서 — 1988년 여름, 한 학자가 발굴한 청동판 여섯 조각의 음각 글자로요. 두 판본 사이에는 1,968년의 시간과, 한 역사가의 손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두 판본은 정반대를 말하면서도 서로를 증명해요.
검은 옷의 행렬, 그리고 빈 자리
서기 20년 초, 브룬디시움(현 브린디시) 항구에 아그리피나(Agrippina)가 게르마니쿠스의 유해를 품에 안고 배에서 내렸어요. 안티오크에서 죽은 남편의 재를 이탈리아 남단까지 운반해 온 길이었습니다. 항구는 검은 옷의 군중으로 가득했어요. 재 담긴 항아리를 든 과부, 세 자녀, 호위 군단병들 — 그 행렬이 반도를 북상하는 동안 각 도시 시민들이 길가로 쏟아져 나와 울었습니다.
로마에 닿았을 때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은 민중으로 메워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티베리우스(Tiberius)도 리비아(Livia)도 없었습니다. 타키투스는 한 줄로 잘라 말해요 — 황제 일가는 공식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고요(Ann. 3.3). 이유는 명시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느끼도록 두는 것, 그것이 타키투스의 방식이에요. 빈 자리 하나로 그는 황실과 게르마니쿠스 가문 사이의 균열을 통째로 보여줍니다.
두 갈래의 혐의
며칠 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Gnaeus Calpurnius Piso)가 로마로 돌아왔어요. 시리아 총독에서 해임된 피고인이 원로원 재판을 받으러 스스로 배를 타고 온 거예요. 혐의는 두 갈래였습니다.
첫째, 게르마니쿠스 독살. 증거는 심증뿐이었어요. 안티오크의 만찬석, 마룻바닥 밑에서 나왔다는 저주판과 납 주문, 마르티나(Martina)라는 독살사 — 모두 정황이었고 어느 것도 법정에서 피소에게 직접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군단 장악과 게르마니쿠스 명령 불복종. 이건 증거가 명백했어요. 피소는 게르마니쿠스 사후 코스 섬으로 도주했고, 시리아 군단을 자신의 이름으로 재편하려 시도했거든요. 이 두 갈래의 비대칭 — 한쪽은 자극적이지만 입증 불가, 다른 쪽은 밋밋하지만 확실 — 이 재판 전체의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재판 전체를 원로원에 위임했어요. 그리고 직접 원로원 앞에 서서 한 연설을 했습니다(Ann. 3.12).
"고발자이자 재판관일 수는 없습니다"
티베리우스의 연설 첫 문장은 완벽한 중립이었어요.
non possum, patres conscripti, tam accusator esse quam iudex
"원로원 의원 여러분, 나는 고발자이자 동시에 재판관일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피해자 가문의 가장이자 국가의 최고 재판관이에요. 그 이중 역할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는 자기 자리를 iustus arbiter(공정한 중재자)로 규정합니다. 판결은 원로원이 내려야 한다, 자기는 물러선다 — 표면적으로는요.
그러나 연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리고 타키투스는 독자에게 자세히 읽기를 요구하는데, 구조가 묘해요. 티베리우스는 독살 혐의를 짧게 지나갑니다. 증거 부족을 상기시키고, 의심만으로 귀족을 처형할 수 없다는 원칙을 인용해요. 반면 군단 장악 혐의는 길게 강조합니다. 로마 국법에 대한 반역, 공공 질서의 파괴 — 그 부분에서 목소리가 단호해져요. 원로원 의원들은 듣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유죄로 판결해야 하는지 이해해요. 황제는 판결을 지시하지 않았어요. 단지 어디에 증거가 있는지 가리켰을 뿐입니다. 이것이 타키투스가 평생 추적한 dissimulatio(속내 감추기)의 교과서적 장면이에요.
innocens — 한 단어의 유서
재판은 며칠에 걸쳐 진행됐어요. 관중은 포룸에 넘쳤습니다. 피소는 변론했고, 아내 플란키나(Plancina)가 옆에 있었어요 — 처음에는요. 플란키나는 리비아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타키투스는 그녀가 시리아로 떠날 때 리비아가 secretis praeceptis(비밀 지시)를 내렸음을 일찍이 암시했어요(Ann. 2.43). 무엇을 하라는 지시였는지는 확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의 포룸에서, 그 비밀이 재판정의 공식 증거와 충돌하려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플란키나는 남편을 버렸습니다(Ann. 3.15). 자기 운명이 피소의 운명과 분리될 수 있다는 신호를 리비아로부터 받은 직후였어요.
그날 밤, 피소는 자택 서재에 혼자 있었습니다. 아침에 하인이 문을 두드렸을 때 답이 없었어요. 안에서 피소는 칼 위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유서가 놓여 있었고, 그 단어 하나가 후대에 남았어요 — innocens, "나는 결백하다." 단 한 마디. 그 아래엔 아들 마르쿠스(Marcus)의 재산 보전을 간청하는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건, 그가 무엇에 대해 결백을 주장했느냐예요. 독살 혐의에 대한 부인이었습니다. 군단 장악에 대한 부인이 아니었어요. 그는 자기가 무엇에 대해 결백한지를 정확히 골라서 말하고 죽은 거예요. 타키투스는 한 가지를 더 흘립니다 — 자살 직전 피소가 티베리우스로부터 서신을 받았다는 정황(Ann. 3.15). 내용도 전달자도 기록되지 않아요. 확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연대기』 전형의 "의심의 씨앗" 기법입니다.
피소가 자살한 아침,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슬픔을 표했어요. 무고한 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것이 자기가 원한 결말이 아니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플란키나는 사면됐어요(Ann. 3.17). 공식 이유는 리비아의 공개 탄원이었습니다. 노쇠한 어머니가 오랜 친구의 구명을 청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요. 아들 마르쿠스는 재산을 보전받고 추방을 면제받았어요. 정치적 균형은 완벽했습니다. 피소는 체제 위협 혐의로 처벌됐고, 플란키나는 비밀 지시의 공식 보상을 받았으며, 게르마니쿠스 가문은 표면상 복수를 얻었어요. 그리고 공식 책임자는 원로원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돌아온 청동판
그런데 1988년, 스페인 남부 바이티카(현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들판에서 청동 조각이 발굴됐어요. 여섯 조각이 맞춰졌을 때 학자들은 곧 깨달았습니다. senatus consultum de Cn. Pisone patre(SCPP) — 피소 재판의 원로원 공식 결의안이었어요. 길이 약 110센티미터, 174행의 라틴어 대문자 음각. 날짜까지 명시돼 있었습니다 — 서기 20년 12월 10일. 재판 종결 직후 제국 전역 속주에 청동판 사본을 게시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이건 바이티카에 배포된 사본 중 하나였어요. 타키투스가 언급한 "원로원 판결"의 실제 공식 텍스트가, 1,968년 만에 땅에서 돌아온 겁니다.
비문은 타키투스 서술과 대체로 일치해요. 피소의 군단 장악 혐의 유죄, 플란키나 사면, 마르쿠스 재산 보전. 그러나 해석의 무게는 전혀 달랐습니다. SCPP는 피소의 죄를 네 가지로 나열해요 —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불복종, 속주 행정 방해, 내전 선동, 황실의 품위 훼손(maiestas imminuta). 독살은 공식 혐의로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비문은 티베리우스의 iustitia(정의로움), 리비아의 pietas(경건함), 드루수스의 moderatio(절제)를 차례로 찬양해요. 아그리피나의 격렬한 슬픔은 부적절한 것으로 암시되고, 그녀가 그 슬픔을 자제한 것이 칭찬받습니다. 가문 질서의 복원, 황제의 자비로운 심판, 원로원의 충성 맹세 — 그것이 비문의 공식 서사예요.
두 판본은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증명한다
타키투스의 Ann. 3.12–3.19에는 이 찬양 중 어느 것도 그대로 실리지 않아요. 티베리우스의 iustitia는 "공정한 중재자의 연기"로, 리비아의 pietas는 "비밀 지시의 공식 보상"으로, 아그리피나의 자제 찬양은 그녀에 대한 암묵적 경멸의 증거로 번역됩니다. 비문이 공식적으로 축복하는 것을, 타키투스는 수사학적으로 의심해요. 청동판은 제국이 공식적으로 기억하기를 원한 판본이에요 — 속주의 벽에 붙어 100년을 버틸 판본. 타키투스의 『연대기』 3권은 한 역사가가 95년 뒤 추출한 이면의 구조입니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요? 사실 잘못 놓인 질문이에요. 청동판은 서기 20년 12월 10일 로마 국가가 공식 선언한 것이고, 타키투스의 서술은 95년 뒤 한 역사가가 그 선언의 행간에서 추출한 것이거든요. 비문은 묻습니다 — 국가는 무엇을 선언했는가. 타키투스는 묻습니다 — 그 선언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두 판본은 경쟁하지 않아요. 서로를 증명합니다. 타키투스의 해석이 정당화되는 건, 정확히 비문의 공식성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이에요. 어느 재판도 저렇게 깔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깔끔함 자체가 이면의 조율을 증명해요.
이건 리옹 청동판과 Ann. 11.24의 관계와 닮았습니다. 그때는 한 연설의 두 판본이었고,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의 학자적 여담을 잘라냈어요 — 스타일의 번역. SCPP에서 타키투스는 원로원의 공식 찬양을 전복했습니다 — 의미의 번역. 두 비문은 함께 『연대기』의 방법을 두 번, 스타일에서 한 번, 의미에서 한 번 실증해요. 타키투스는 공식 판본을 받아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식 판본을 번역했어요 — 국가의 언어에서 역사가의 언어로.
다음 편은 같은 권의 섬에서 지워진 이름 — 율리아 추방의 끝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