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8년 가을, 로마 황실에는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었어요. 한 달 전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세 번째 아내 메살리나가 처형됐고, 그녀의 이름은 원로원 결의로 공공장소에서 긁혀 나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황제 본인은 그 빈자리를 채울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쉰여덟의 노황제, 같은 해에 두 번이나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긴 어려웠죠.
그래서 타키투스(Tacitus)는 『연대기』(Annales) 12권의 첫 문장을 이렇게 엽니다 — certamen incessit libertorum, "해방노예들의 경쟁이 시작되었다"(Ann. 12.1). 황후 자리를 누가 채울지를 황제가 아니라 그의 노예 출신 비서들이 다투기 시작한 거예요. 이 짧은 3년 동안 한 여자가 어떻게 로마 200년 의전의 경계를 넘어 황제와 같은 단상에 앉게 되는지 — 그 과정을 따라가 봅니다.
세 해방노예, 세 후보
경쟁자는 세 명이었어요. 서신 담당(ab epistulis) 나르키수스(Narcissus) — 바로 한 달 전 메살리나 처형을 직접 주도한 사람 — 는 클라우디우스의 첫 아내였던 아일리아 파이티나를 밀었습니다. 검증된 여자, 무엇보다 친자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를 계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자식으로 존중해 줄 여자였죠. 청원 담당(a libellis) 칼리스투스(Callistus)는 칼리굴라의 전 아내 롤리아 파울리나를 추천했어요. 막대한 재산에 자식은 없으니, 어떤 후계 분쟁도 일으키지 않을 카드였습니다.
세 번째가 재무 담당(a rationibus) 팔라스(Pallas)였어요. 그가 민 사람은 게르마니쿠스의 딸, 클라우디우스 자신의 조카, 그리고 이미 열한 살 난 아들을 둔 여자 — 아그리피나 소(Agrippina the Younger)였습니다. 세 해방노예가 각자 황제의 방에 따로 들어가 자기 후보를 설득했다고 타키투스는 한 사람씩 묘사해요(Ann. 12.1-2). 나르키수스는 옛정을, 칼리스투스는 재산을 말했죠. 그런데 팔라스는 다른 것을 말했습니다 — 바로 혈통이었어요.
팔라스의 논리와 한 줄의 암시
팔라스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치밀했어요. 게르마니쿠스의 딸을 들이면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다시 궁정에 복귀합니다. 그녀가 데려오는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이 한 소년 안에서 합쳐져요. 브리타니쿠스 한 명의 정통성이 아니라, 두 혈통이 결합한 정통성이 황제에게 생기는 거죠. 그리고 팔라스는 한 문장을 덧붙였습니다 — 아그리피나는 이미 정숙한 과부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요.
타키투스는 이 마지막 말이 팔라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이미 있던 다른 종류의 친밀함을 암시한다고 적어요(Ann. 12.25). 그러나 그 암시는 암시로만 남깁니다. 단정하지 않되 지우지도 않는 것 — 이게 타키투스 특유의 서술 방식이에요. 독자가 행간에서 읽어내도록 두는 거죠.
법을 바꾼 결혼
걸림돌은 법이었어요. 로마 전통에서 숙부와 조카의 결혼은 금지였습니다 — incestum, 곧 근친의 범주였죠. 형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은 야만족의 관습이라고 키케로도 리비우스도 반복해 적었어요. 그런데 해방노예들의 회의가 끝난 며칠 뒤, 이미 세 번이나 집정관을 지내고 아첨의 기술로 소문난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가 연단에 올라섰습니다.
그의 연설은 타키투스가 가시 없이 인용한 드문 순간 중 하나예요(Ann. 12.5-6). 그는 국가 이익을, 동방 왕가의 관례를, 황제의 고독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숙부와 조카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원로원 결의를 제안했어요. 반대는 단 한 사람 — 어느 의원이 짧게 발언하고는 같은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이름만 짧게 적어요. 결의는 통과됐습니다. 국가 이익을 명분으로 왜곡된 법률의 한 사례로 기록된 거죠.
서기 49년 1월 1일,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가 결혼했어요. 같은 해에 원로원은 그녀에게 아우구스타(Augusta)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 리비아가 서기 14년에 받은 이후 35년 만이었죠. 서른넷의 그녀는 이미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유배를 거친 사람이었고, 오빠 칼리굴라의 치세 동안 폰티아 섬에서 4년을 견딘 사람이었어요. 이제 그녀는 제국의 공식 여성 칭호를 지녔고, 동전에 초상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첫 정치 행동으로, 코르시카에서 8년째 유배 중이던 세네카(Seneca)를 풀어 아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어요. 타키투스는 한 줄을 남깁니다 — 세네카는 "아그리피나의 은혜를 평생 기억할 것이라고 믿어졌다"(Ann. 12.8). 그 "평생"이 얼마나 길지는 10년 뒤 네로의 명령으로 드러나게 되죠.
네로의 입양, 브리타니쿠스의 소외
서기 50년 2월 25일,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앞에서 아그리피나의 아들을 공식 양자로 입양했어요. 소년의 이름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서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Nero Claudius Caesar)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의 변경 자체가 법적 계승의 문서였죠. 그런데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이미 친자가 있었어요 — 메살리나의 아들 브리타니쿠스, 당시 아홉 살이요.
공식 행사에서 두 소년이 나란히 등장했을 때, 타키투스는 그 대조를 놓치지 않습니다(Ann. 12.26). 네로는 성인 복장(toga virilis)을, 브리타니쿠스는 여전히 어린이의 자주색 띠 두른 예복(toga praetexta)을 입고 있었어요. 네로는 세 살 위였을 뿐인데, 옷은 세대가 달라 보였습니다. 군중이 환호한 쪽은 네로였죠. 타키투스는 군중의 반응을 별말 없이 지나가요. 그런데 그가 "별말 없이"일 때가 가장 무거운 말을 하는 순간이라는 걸, 이제 독자는 압니다.
서기 51년, 네로는 열세 살에 불과했지만 조기 성인식을 받았어요. 법적 계승자의 지위를 의식으로 확정하는 절차였죠. 같은 해 친위대장(praefectus praetorio) 자리가 비자, 아그리피나는 직전까지 자기 재산을 관리하던 집사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를 그 자리에 올렸습니다. 한 노련한 군인이 황후의 집사에서 근위군 지휘관으로 오른 거예요. 타키투스는 이 임명의 의미를 짧게 요약합니다(Ann. 12.42): 단일 지휘관 체제는 복수 지휘관 체제보다 음모에 더 가깝다고요. 그가 왜 이 문장을 썼는지는 8년 뒤, 부루스가 아그리피나 살해 명령을 차마 집행하지 못하고 돌아선 그 밤에 가서야 풀립니다.
같은 단상에 앉은 여자
그리고 그해 여름, 로마 포룸에 카라크타쿠스(Caratacus)가 도착했어요. 브리튼의 저항 지도자, 9년간 로마 군단을 산지에서 농락하다 마지막엔 브리간테스족 여왕 카르티만두아의 배신으로 쇠사슬에 묶여 송환된 사람이었죠. 가족 전부가 함께 포획됐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귀한 포로를 공식 접견으로 맞기로 했어요. 친위대가 도열했고, 단상이 세워졌고, 황제가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하나의 단상이 세워졌어요. 타키투스는 건조하게 기술합니다 — haud procul Caesare alia sedes Agrippinam, "카이사르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아그리피나의 또 다른 좌석이 있었다"(Ann. 12.37). 같은 높이, 같은 방향, 같은 외교 사절을 향해서요.
로마 역사상 이런 장면은 없었어요. 공화정 600년 동안도, 아우구스투스 41년 동안도, 티베리우스 23년 동안도 — 황제와 여성이 같은 단상에서 동시에 외국 사절을 맞은 적은 없었습니다. 여성은 남편 뒤에 서거나, 회랑에서 커튼 너머로 보거나,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것이 200년 된 로마 의전이었죠. 그런데 이제 서른다섯의 아그리피나가 황제와 동일한 의전 공간에서, 동일한 높이로, 쇠사슬에 묶인 브리튼 왕 앞에 앉아 있었어요. 그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 그럴 필요도 없었죠. 그 앉음 자체가 문장이었으니까요.
타키투스의 붓이 여기서 가장 무거워집니다. 그는 라틴어 한 구를 남겨요:
novum sane et moribus veterum insolitum, feminam signis Romanis praesidere "참으로 새롭고 옛 관습에 맞지 않는 일이다 — 한 여자가 로마의 군기(軍旗) 앞에 주재하는 것은."
novum sane, "참으로 새롭다". 타키투스의 어휘에서 novum은 결코 찬사가 아니에요. 그것은 전례 없음 — 곧 조상의 경계를 넘음을 뜻합니다. 관습(mos)은 로마 국가의 보이지 않는 법이고, 그것이 무너지면 공식 법률이 멀쩡해 보여도 국가는 이미 변형된 거예요. 아그리피나는 어떤 법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 그녀를 위한 특별법이 이미 통과됐으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관습의 경계를 넘었고, 타키투스는 그 경계의 이동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어요. 포로 왕 카라크타쿠스는 사면을 받은 직후, 황제의 단상과 황후의 단상 양쪽 모두에 똑같이 감사의 절을 했다고 합니다. 타키투스는 이 이중의 절을 적으며 "그녀의 영예가 이제 대외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고만 덧붙여요(Ann. 12.37).
한 여자의 공식화
로마의 왕정 폐지로부터 559년,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 복원 선언으로부터 77년 만에, 한 황후가 처음으로 외교 무대에 공식 등장했어요. 그녀의 이름은 칭호로, 초상은 동전으로, 좌석은 단상으로 로마 세계에 발송됐습니다. 팔라스의 설득, 비텔리우스의 연설, 특별법의 통과, 아우구스타 칭호, 네로의 입양, 부루스의 임명, 그리고 카라크타쿠스의 이중의 절까지 — 3년이 채 안 되는 동안 로마의 의전 지도가 다시 그려진 거예요.
타키투스는 이 재편을 분노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아그리피나의 무능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유능을 향해요. 그녀는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매 단계마다 법적 형식을 갖췄고, 원로원 결의를 받았고, 가장 전략적인 해방노예와 동맹했고, 친위대 지휘권을 자기 사람으로 채웠고, 아들을 법적 후계로 확정했죠. 그녀의 단 하나의 구조적 약점 — 자체 군사력의 부재 — 은 서기 51년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것은 서기 59년, 자기 아들이 보낸 군인이 그녀의 방에 들어올 때에야 드러나게 됩니다. 그 밤의 마지막 말 — ventrem feri, "[네로를 낳은] 자궁을 쳐라" — 을 타키투스는 14권에 남겨요. 그러나 카라크타쿠스 앞 단상에서는 아직 그것도 먼 미래였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공식적이었고, 아우구스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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