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2년, 로마의 한 해 동안 네 사람이 사라졌어요. 친위대장 부루스, 스승 세네카(사실상), 황후 옥타비아, 그리고 해방노예 팔라스. 네로가 "5년의 선정"을 떠받쳐온 모든 기둥이 단 한 해에 철거된 거예요. 타키투스는 이 네 죽음을 한 묶음으로 엮어 자문가 시대의 종결을 기록합니다.
타키투스(Tacitus)의 『연대기』(Annales) 14권 51-65장 — 그러나 같은 해 가을, 타키투스가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은 또 다른 무대가 지중해 동쪽에서 펼쳐지고 있었어요. 유대에 새 총독이 부임하고, 쇠사슬을 찬 한 사도가 "가이사에게 상소하노라"고 외치며 로마행 배에 오릅니다(행 25:11). 네로의 궁정에서 네 기둥이 무너지는 동안, 그 궁정을 향해 복음을 실은 한 사람이 천천히 항해하고 있었던 거죠. 이 글은 타키투스가 기록한 로마 궁정의 죽음과, 타키투스가 침묵한 유대의 새 시작이라는 이중 시간축을 함께 읽습니다.
"나는 잘 있다" — 부루스의 마지막 말
타키투스는 부루스(Burrus)의 죽음을 두 줄로 처리해요 — incertum valetudine an veneno, "병인지 독인지 불확실"하다고요(Ann. 14.51). 목구멍 종양이 호흡을 막았다는 게 병설의 근거였고, 네로가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의 구개에 유해한 약을 발랐다는 게 독설의 근거였습니다. 타키투스는 판정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가 남긴 마지막 장면은 판정 이상입니다.
네로가 병문안을 왔을 때, 죽어가던 친위대장은 등을 돌렸고 신음하듯 말했어요 — ego me bene habeo, "나는 잘 있다". 평범한 병자의 답변이었지만, 동시에 도덕적 자기 평가였습니다 — 나는 너의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잘 있다고요. 그리고 최후의 저항이기도 했어요 — 황제를 등진 그 자세 자체가 거부의 언어였거든요. 세 겹의 의미가 다섯 음절에 눌려 있었습니다. 3년 전 아그리피나 살해 때 "친위대는 게르마니쿠스의 딸을 살해하지 않는다"(Ann. 14.7)고 잘라 말했던 그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의 양심 하나만을 가져가는 중이었어요.
시골로 물러난 철학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Seneca)는 보호막을 잃었어요. 두 사람이 서기 54년부터 함께 지탱해온 "5년의 선정"(Quinquennium Neronis)이 한쪽 기둥을 잃고 기울었습니다. 예순넷의 세네카는 궁정에 은퇴를 청원해요(Ann. 14.53-54) — 14년을 봉사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측근들에게 허락한 선례가 있으니, 모든 재산을 황제께 돌려드리고 철학적 고요 속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요.
네로는 표면상 거부했어요. 그러나 재산 반환 제안 자체가 덫이었습니다 — 부를 유지하면 "탐욕" 비난의 구실이 됐고, 부를 포기하면 빈곤한 철학자의 이미지조차 네로의 손에 잡힐 위험이 있었거든요. 세네카는 그 답변에 감사했어요 — 원치 않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익숙한 자처럼요(Ann. 14.56). 그는 노멘툼의 시골 저택으로 이주해 공개 행사를 끊고, 『도덕 서한』(Epistulae Morales) 124편을 쓰기 시작합니다. 3년 뒤 피소 음모가 실패했을 때 네로가 그에게 보낸 자살 명령(Ann. 15.60-64)은 바로 이 은퇴 시도의 연장선이었어요. 타키투스는 세네카를 양면적으로 그립니다 — 도덕을 가르쳤으나 부를 축적했고, 연설문을 대필했으나 아그리피나 살해에 공모했죠.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가서야 그는 자기가 쓴 책의 내용을 실천했어요.
같은 가을, 유대로 온 새 총독
같은 해 가을, 타키투스가 침묵한 유대에서는 펠릭스(Felix)가 로마로 소환되고 있었어요. 요세푸스(Jos. AJ 20.182)가 이를 기록합니다 — 유대 사절단이 펠릭스를 고발하러 왔으나, 형 팔라스(Pallas)의 중재로 그는 처벌을 면했다고요(팔라스 자신이 같은 서기 62년 네로의 독살 명단에 올라 있다는 걸 펠릭스는 아직 몰랐습니다). 그 자리에 포르키우스 페스투스(Porcius Festus)가 후임으로 부임해요. 공정한 법관이었고, 짧은 재임이 될 것이었습니다.
"적은 말로" — 거부한 왕
회의가 끝나고 왕과 총독과 배석자들이 일어나 서로 말했어요 — "이 사람은 죽일 만하거나 결박할 만한 행사가 없다"(행 26:31). 아그립바의 마지막 말이 가장 아이러니했습니다 —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행 26:32).
뜨거운 욕조의 옥타비아
타키투스는 이 모든 걸 모릅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 옥타비아(Octavia)를 써요(Ann. 14.60-64). 새 연인 포파이아(Poppaea)가 임신했고, 공식 황후의 자리가 필요했거든요. 티겔리누스(Tigellinus)의 고문으로 옥타비아의 여성 노예들에게서 간통 자백을 강요하려 했지만, 한 노예 피티아스(Pythias)가 유명한 대답을 남깁니다 — "옥타비아의 신체는 저 여자[포파이아]의 입보다 더 정결하다"고요.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요. 네로는 일단 옥타비아를 캄파니아로 유배 보냅니다. 그러자 로마 민중이 거리로 나와 포파이아의 동상을 철거하고 옥타비아의 동상을 환영했어요. 포파이아가 네로에게 울며 간청합니다 — "내 목숨이 위험하다"고요.
네로는 아니케투스(Anicetus)를 소환했어요. 3년 전 아그리피나 살해를 실행한 바로 그 함대 사령관이었습니다. 같은 사람이 모친과 아내를 모두 제거하게 된 사실에서 타키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요. 네로의 제안은 단순했습니다 — 공개 법정에서 "옥타비아와 간통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면, 보상으로 사르디니아 섬에서 편안히 은퇴시켜주겠다고요. 아니케투스는 자백했고, 정황을 날조했으며, 원로원에 공식 발표됐어요.
옥타비아는 판다테리아(Pandateria) 섬으로 추방됩니다. 타키투스의 한 구절이 그 섬의 역사를 압축해요 — Pandateria ... tamquam exilio feminarum destinata, "판다테리아는 마치 여인의 유배지로 지정된 것처럼"(Ann. 14.63). 이전에 아우구스투스의 친딸 율리아가 그곳에 유배됐고(기원전 2년),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大)아그리피나 — 네로의 할머니 세대 — 도 그곳에 유배됐어요(서기 29년). 이제 네로의 아내 옥타비아가 거기 있었습니다(서기 62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여성 3세대가 같은 섬에서 같은 운명을 만난 거예요. 운명이 지정한 게 아니라 권력이 지정했지만, 권력은 운명의 이름을 빌려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
며칠 뒤 군인들이 섬에 도착해 스물두 살 옥타비아에게 자살 명령을 전달했어요. 정맥 절개(venae resolutae)가 첫 방법이었지만, 두려움으로 피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군인들이 그녀를 뜨거운 욕조(balneum calidum)에 담갔어요. 증기가 폐를 채웠고, 옥타비아가 죽었습니다. 타키투스의 최후 문장이 냉정하게 기록해요 — caput amputatum latumque in urbem Poppaea vidit, "잘린 머리가 로마로 송환되어 포파이아가 눈으로 확인했다"(Ann. 14.64). 확인의 요구가 살해의 완성이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친딸이자 브리타니쿠스의 여동생인 스물두 살 혈통 공주가, 9년간 황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남편의 명령으로 섬에서 증기에 질식해 죽었고, 그 머리가 새 황후의 눈앞에 놓인 거예요. 타키투스는 도덕적 논평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 사실이 이미 모럴리즘의 전부였으니까요. 3년 뒤 세네카가 같은 방법, 곧 정맥과 욕조로 죽을 것이었어요(Ann. 15.60-64). 차이는 하나였습니다 — 세네카는 선택했고, 옥타비아는 강제당했어요.
같은 해 또 한 해방노예가 죽습니다(Ann. 14.65) — 네로가 오래 증오하던 도리포루스와 팔라스를 독살했어요. 팔라스는 펠릭스의 형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재무 담당, 서기 49년 아그리피나의 황후 즉위를 추천한 3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가였습니다. 펠릭스를 소환 처벌에서 구해준 바로 그 형이, 펠릭스가 소환된 같은 해에 독으로 죽은 거예요.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해방노예 관료 네트워크가 한 사람씩 지워졌고, 그 자리에 티겔리누스의 친위대가 들어섰습니다. 『연대기』 15권의 대화재·기독교 박해·피소 음모가 모두 이 빈자리에서 일어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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