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유일한 친딸이 남이탈리아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굶어 죽었다는 기록은, 타키투스(Tacitus)에서 단 네 줄이에요. 『연대기』(Annales) 3.24. 제국을 세운 사람의 외동딸인데 말이죠.
그런데 이 짧음이 실수가 아니에요. 그건 의도된 침묵이었습니다. 타키투스에게는 기록의 부재가 곧 기록이었고, 침묵의 크기가 곧 메시지였거든요. 아우구스투스가 친딸을 법으로 지웠다면, 타키투스는 친딸의 죽음을 문체로 지웠어요. 이건 한 여인의 비극인 동시에, 로마 제국이 자신의 기원을 어떻게 기억하기로 했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품을 모르고 자란 딸
율리아(Julia)는 기원전 39년, 아우구스투스와 두 번째 아내 스크리보니아(Scribonia)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Livia)와 결혼하려고 스크리보니아를 딸을 낳은 바로 그날 이혼시켰습니다. 그래서 율리아는 친어머니의 품을 알지 못한 채 계모 리비아의 궁정에서 자랐어요.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정략의 도구였습니다. 결혼만 세 번 — 마르켈루스(조카), 아그리파(아버지의 오른팔), 그리고 마지막으로 티베리우스(Tiberius). 티베리우스는 그녀를 싫어했고, 그녀는 티베리우스를 경멸했어요. 아우구스투스는 딸의 세 번째 결혼이 왕조의 최후 봉합선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가 로도스로 자진 은퇴했을 때, 율리아는 로마에 남았어요. 그리고 그녀의 사생활에 관한 소문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율루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의 아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연회 파트너로 지명된 남자들의 이름이 원로원과 거리에서 속삭여졌어요.
법이 입안자의 가문을 삼키다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는 인내를 끝냈어요. 원로원에 친딸의 간통을 공개 고발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 로마사에서 황제가 자기 딸을 정치적 위협으로 지목한 유일한 사례였어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순간 아우구스투스가 친구들에게 세 문장을 말했다고 기록합니다(Suet. Aug. 65). utinam aut caelebs mansissem aut orbus periissem — "차라리 내가 미혼으로 남거나 자식 없이 죽기를 바랐다."
가장 잔인한 부분은 적용된 법이었어요. 아우구스투스는 Lex Iulia de adulteriis, 자신이 기원전 18년에 통과시킨 간통법 — 간통한 여성의 유배를 의무화하는 법 — 의 가장 고통스러운 첫 적용 대상으로 자기 친딸을 지목했습니다. 법이 입안자의 가문을 삼킨 거예요. 로마의 상징적 질서를 위해 제정된 법이, 로마의 상징적 계승선을 절단했습니다.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나머지 남자들은 유배됐어요. 율리아는 판다테리아(Pandateria) — 나폴리 앞바다의 작은 화산섬, 길이 2킬로미터, 거주민 없음 — 으로 보내졌습니다. 어머니 스크리보니아가 딸을 따라 섬으로 건너갔어요. 포도주 금지, 남성 방문객 금지, 아우구스투스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섬과 해협의 16년
판다테리아의 햇빛은 로마와 같았지만,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같지 않았어요. 섬 둘레를 다 돌아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5년이 흘렀어요. 로마 민중이 율리아의 사면을 청원하자 아우구스투스는 연설로 거절했다고 디오가 전합니다(Dio 56.32) — utinam vobis tales filiae et tales uxores contingerent, "그대들에게도 이런 딸과 이런 아내가 주어지기를."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어요.
아우구스투스는 결코 딸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서기 4년, 더 많은 동정의 파도가 밀려오자 마지못해 율리아를 레기움(Rhegium) — 이탈리아 반도의 발끝, 시칠리아 해협을 건너는 항구 도시 — 으로 옮겼어요. 섬은 아니었으나 해협에 막힌 반도였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10년을 더 살았어요. 포도주는 여전히 금지, 남성 방문객도 여전히 금지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공식 문서에서 삭제됐어요.
서기 14년 8월, 놀라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언장이 공개됐는데 율리아는 언급되지 않았어요. ne sepulchro quidem suo inferri passus est — "자신의 무덤 안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Suet. Aug. 101). 아우구스투스 영묘, 마르스 평원의 거대한 원형 분묘, 왕조의 석관들이 나란히 놓인 그곳에, 율리아의 유해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올랐어요. 그의 첫 행정 행위 중 하나는 레기움의 율리아에게 수당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 금지, 남성 방문객 금지, 이제는 음식도 금지. 굶주림은 며칠 만에 닥쳤어요. 그녀는 52세였고, 아우구스투스 사망 소식이 레기움에 닿은 뒤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네 줄로 충분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 3.24에서 서기 21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최후를 돌아봐요. 그러면서 한 줄의 메타 주석을 남깁니다 — famam exspirantis ... rumoris augendi causa, "죽어가는 자의 소문을, 단지 소문을 부풀리는 것 말고는 달리 남길 것이 없었다."
이건 율리아에 대한 진술이자 동시에 타키투스 자신에 대한 진술이었어요. 그는 축약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침묵을 수사학으로 사용했어요. 만약 그가 더 많이 썼다면, 율리아를 재평가하는 척했을 것이고, 그 재평가는 아우구스투스를 재평가했을 것이며, 이는 티베리우스 체제 전체의 법적 기초를 흔들었을 거예요. 그는 적게 씀으로써 많이 말한 겁니다. 독자가 네 줄을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짧음 자체가 로마 제국이 자신의 기원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비추는 거울이 됐어요.
그리고 이 권의 마지막 장에서 타키투스는 같은 기법을 한 번 더 씁니다. 서기 22년 말, 유니아 테르티아(Junia Tertia)의 장례 기록이에요(Ann. 3.76). 유니아는 브루투스의 누이이자 카시우스의 아내, 카이사르 암살자 가문의 마지막 생존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장례 행렬에는 수십 개의 귀족 조상 가면(imagines)이 함께 운반됐는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가면만은 운송이 금지됐어요.
sed praefulgebant Cassius atque Brutus eo ipso quod effigies eorum non visebantur
"그러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는 바로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빛났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크게 보입니다. 지워진 이름이 가장 크게 읽혀요. 아우구스투스가 법으로 지운 친딸, 티베리우스가 굶김으로 지운 의붓딸, 원로원이 가면 금지로 지운 공화정의 영웅들 — 세 개의 지움이 같은 권의 처음과 끝을 감쌉니다. 공식 기억의 삭제가, 곧 공식 기억의 방식이었어요.
한 섬이 시작한 60년의 유배 라인
율리아의 죽음이 단지 한 여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녀가 판다테리아에 보내진 그 순간, 율리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여성 파괴 구조가 스스로 개시됐거든요.
율리아 마이오르는 레기움에서 사라졌고, 그녀의 딸 율리아 미노르도 서기 8년에 역시 간통 혐의로 트리메루스 섬에 유배되어 서기 28년에 죽었어요. 그녀의 손녀 대(大)아그리피나(Agrippina the Elder)는 서기 29년에 판다테리아 — 친조모가 유배된 바로 그 섬 — 로 추방되어 서기 33년에 굶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리피나의 손녀 옥타비아(Octavia), 곧 네로의 아내가 서기 62년에 역시 판다테리아에서 뜨거운 욕조의 증기에 질식해 죽게 되리라는 것을, 타키투스는 한 부사구로 봉인해요(Ann. 14.63) — Pandateria ... tamquam exilio feminarum destinata, "판다테리아는 마치 여인의 유배지로 지정된 것처럼."
tamquam destinata, "마치 지정된 것처럼." 이 부사구가 뒤돌아 바라보는 원형 지점이 바로 율리아 마이오르의 기원전 2년 유배예요.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친딸을 섬에 보냈을 때, 그는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가문을 희생시켰고, 그 희생이 60년에 걸쳐 증조모에서 증손녀에게로 확산됐습니다.
여기서 가장 서늘한 건 타키투스의 시선이에요. 그는 2세기 초에 이 글을 쓰면서, 이미 네로의 몰락도, 네 황제의 해도, 플라비우스의 부상과 몰락도 모두 본 사람이었습니다. 율리아의 네 줄이 옥타비아의 뜨거운 욕조로 이어지는 60년의 궤적 전체를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는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적습니다. 그것이 그의 dissimulatio였어요 — 서술자의 dissimulatio. 티베리우스가 "공정한 중재자"를 연기하며 실제 의도를 감추었듯이, 타키투스는 "짧은 회고자"를 연기하며 실제 역사적 판정을 감춥니다. 황제의 연기와 역사가의 연기가 같은 수사학적 DNA를 공유해요.
밤이 내리면 율리아는 레기움의 창문을 열고 시칠리아 쪽을 바라보았을 거예요.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딸이었고, 율리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모든 정당성이 그녀의 혈통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녀 없이는 그 가문의 이름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에서 배제된 채, 남편의 첫 명령으로 음식을 끊기고, 며칠 만에 죽었습니다. 유해가 어느 무덤에 묻혔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묘비문도 쓰이지 않았으며, 로마의 공식 달력에서 그녀의 사망일은 기록되지 않았어요. 타키투스는 7년 뒤 네 줄을 썼습니다. 기록의 부재가 기록이었어요. 네 줄로 충분했고, 네 줄이 정확히 필요한 만큼이었습니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