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2년, 아르메니아 고원의 좁은 협곡에서 로마 군단 하나가 무기를 내려놓고 세 개의 창으로 엮은 낮은 문 아래를 한 사람씩 지나갔어요. 머리를 숙이고, 보급품도 다 두고, 적의 진영 한가운데를 통과해서요.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로마인에게 이건 32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타키투스(Tacitus)는 『연대기』(Annales) 15권의 첫머리를 이 굴욕으로 엽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그 뒤에 이어지는 반전이에요. 같은 자리, 같은 평원에서 몇 달 뒤 이번엔 파르티아 왕자가 자기 왕관을 로마 황제의 초상 앞에 내려놓거든요. 그리고 이 이야기 끝에는 타키투스가 던지는 차가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 왜 어리석은 자는 살아남고, 유능한 자는 죽었을까요. 자신감, 신중함, 그리고 제국이 유능한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예요.
"왕관을 가져오겠습니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자신감에서 시작돼요.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Lucius Caesennius Paetus) — 전직 집정관이자 네로(Nero)가 갓 임명한 카파도키아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부임도 하기 전에 네로에게 호기로운 편지를 보냈어요. "대왕 티리다테스의 왕관을 가져다 황제 앞에 놓겠습니다"라고요. 심지어 전승비와 개선문(trophaea et arcus)을 미리 세워 두라는 요구까지 담은 편지였습니다(Ann. 15.8).
문제는, 같은 동방 전선의 이웃 속주 시리아에 이미 진짜 실력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Gnaeus Domitius Corbulo) — AD 58~60년 두 차례 원정으로 아르메니아의 두 거점 티그라노케르타와 아르탁사타를 함락시킨 노련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파이투스는 자기 군단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네로는 그 자신감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유능한 코르불로보다, 호언장담하는 파이투스 쪽이 다루기 편했던 거죠.
파이투스가 거느린 건 IV 스키티카(Scythica)와 XII 풀미나타(Fulminata), 두 군단이었어요. 다만 코르불로 밑에서 단련된 정예가 아니라, 시리아의 오랜 주둔지에서 안일에 빠져 있던 병사들이었습니다. 코르불로는 떠나면서 짧게 경고했다고 해요 — 이 군단의 규율을 믿지 말라고. 타키투스는 코르불로가 자기 병사들에게 시킨 혹독한 훈련(tantum operis ac laboris exanclatum, "그토록 많은 노역과 고생을 견뎌냈다")을 길게 묘사하면서, 두 지휘관의 차이를 은근히 대비시킵니다(Ann. 15.16).
란데이아의 함정
파이투스는 카파도키아에서 아르메니아 북부로 진격했어요. 그리고 란데이아(Rhandeia) — 아르사니아스(오늘날 무라트) 강가의 요새 — 에 자기 아내와 어린 아들까지 데려왔습니다. 원정이라기보다 가족 동반 관광에 가까운 행렬이었어요. 그는 적을 너무 가볍게 봤습니다.
맞은편에는 파르티아의 왕중왕 볼로가이세스 1세(Vologases I, 재위 AD 51~78)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있었어요. 동생 티리다테스(Tiridates)를 아르메니아 왕좌에 앉히는 것이 그의 오랜 야심이었죠. 볼로가이세스는 여름이 끝나기 전에 란데이아를 포위했습니다. 파이투스는 첫 탐색 공격으로 전초 부대를 잃고, 두 번째 공격으로 진영 외곽을 내줬어요.
그러자 그 호기롭던 사람이 코르불로에게 다급한 파발을 띄웁니다 — 제발 구원해 달라고요. 타키투스는 이 전환을 냉정하게 적어요. 몇 달 전 "전승비를 세우겠다"던 사람이, 이제는 "로마를 위해 군단을 보존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고요. 한 사람의 허세가 무너지는 데에 한 계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멍에 밑으로 — sub iugum missi
코르불로는 시리아의 제우그마(Zeugma)에서 출발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넜어요.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가을은 짧고, 눈이 내리기 전에 닿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코르불로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파르티아 진영에 닿기도 전에 — 파이투스는 이미 항복 조약에 서명해 버렸어요.
타키투스는 그 조건을 항목별로 기록합니다(Ann. 15.15). 로마군은 무기와 보급품을 전부 남기고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다. 볼로가이세스 진영 한복판을 통과해 퇴각한다. 그리고 — 타키투스의 붓이 가장 무거워지는 대목 — 로마 군단은 멍에 밑을 지나야 했습니다.
sub iugum missi, "멍에 밑으로 보내졌다." 타키투스는 이 순간을 326년 전의 기억과 나란히 놓아요. 기원전 321년, 제2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 집정관 두 사람이 카우디네 협곡(Caudine Forks)의 좁은 길에 갇혀 똑같은 굴욕을 겪었거든요. 그 뒤로 로마 군단은 단 한 번도 멍에 아래를 지난 적이 없었습니다. 326년 동안 마리우스도, 술라도, 카이사르도, 아우구스투스도, 어떤 패전에서도 이 의식만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네로 치세의 두 군단이, 파이투스의 경솔함과 볼로가이세스의 냉정한 계산 속에서, 세 개의 창으로 엮은 그 단순한 문(ignominiosum iugum) 아래를 무기 없이 한 사람씩 지나간 겁니다.
타키투스의 문장은 직설적이에요 — legiones sub iugum missae et cetera, quae alienae servituti patienda sunt, "군단들은 멍에 밑으로 보내졌다. 그 밖에도 남의 종살이에서 견뎌야 할 모든 것을." 그 "그 밖에도"에 그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로마 독자라면 알 것이기 때문이에요.
퇴각 직후 파이투스는 코르불로의 구원군과 마주쳤어요. 코르불로가 "지금 돌아가서 조약을 찢자"고 제안했지만 파이투스는 거절했습니다. 이미 서약했다는 이유로요. 타키투스의 짧은 촌평이 따끔합니다 — 파이투스는 이 서약은 지킬 줄 알았지만, 정작 원래 한 약속, "왕관을 가져오겠다"던 그 편지는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다고요. 그런데 네로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statim ignosci, ne tam promptus in metum diutino timore aegresceret, "당장 용서한다, 겁이 많은 자가 오래 떨다 병들지 않도록"(Ann. 15.25). 네로다운 냉소였습니다.
코르불로의 시간
이제 코르불로의 시간이었어요. AD 63년 봄, 네로는 동방 전 군단의 지휘권을 코르불로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대사령권(imperium maius)을 수여합니다. 시리아·카파도키아·유대·갈라티아의 모든 군단이 한 지휘관 아래 모였어요. 타키투스는 이 결정의 무게를 짧게 짚습니다 — 이런 광범위한 사령권은 폼페이우스 이후 처음이라고요(Ann. 15.25). 공화정 말기의 "제1인자" 이래 단일 장군에게 동방 전체를 맡긴 전례가 거의 없었던 거예요. 네로가 이 카드를 꺼낸 건 의지가 아니라 필요 때문이었습니다. 달리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코르불로는 6만 병력으로 유프라테스를 건너 아르메니아로 진격했어요. 그런데 그는 전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단 행렬 자체를 무기로 썼어요. 파르티아 왕조의 협상 전통을 알았고, 볼로가이세스가 동방의 다른 전선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첩보도 쥐고 있었거든요. 그는 전 군단을 천천히 란데이아 — 바로 그 326년 된 치욕의 현장 — 로 이동시켰습니다. 협상은 거기서 열릴 예정이었어요. 장소 자체가 메시지였습니다.
협상 테이블 건너편에 선 사람은 볼로가이세스가 아니라 동생 티리다테스였어요. 서른 남짓의 파르티아 왕자, 아르사케스(Arsacid) 가문의 혈통,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좌의 실질적 점유자였죠. 코르불로의 제안은 놀랄 만큼 간결했습니다.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왕위를 유지해도 좋다. 단, 로마로 직접 와서 네로 앞에서 왕관을 받아야 한다. 왕관을 벗어 네로의 조각상 발치에 내려놓고, 네로의 손으로 다시 머리에 씌움을 받아야 한다 — 이게 조건이었어요. 실질적으로는 파르티아의 승리였고, 의전상으로는 로마의 승리였습니다. 두 제국이 동시에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었죠.
같은 자리, 뒤집힌 장면
티리다테스는 승낙했어요. AD 63년 말, 그는 란데이아 평원에서 네로의 초상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았습니다 — 326년 전 로마 군단이 멍에 아래를 지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요. 타키투스는 이 반전의 대칭을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침묵으로 남겨 둡니다. 코르불로가 이 장면을 설계했고, 티리다테스가 받아들였어요. 3년 뒤 AD 66년, 티리다테스는 9개월에 걸친 행렬 끝에 로마에 도착해 네로에게서 실제 왕관을 받게 되는데, 그 장면은 16권의 몫입니다.
여기서 타키투스의 조용한 아이러니를 놓치면 안 돼요. 파이투스의 경솔함으로 326년의 기록이 깨졌고, 코르불로의 신중함으로 제국의 체면이 회복됐습니다. 한 사람은 호언장담하다 멍에를 불러왔고, 한 사람은 칼을 거의 뽑지 않고 왕관을 받아냈어요.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권에서 그는 기록하거든요 — AD 67년, 네로는 코르불로에게 사절을 보내 자결을 명령합니다. 동방의 수호자가 그리스 켄크레아이(Cenchreae) 부두에서 황제의 사절 앞에 서요. 짧은 편지 한 장. 그는 그것을 읽고 검을 뽑은 뒤, 그리스어로 한마디만 남겼다고 합니다 — Ἄξιος, "나는 그럴 만했다"(Suet. Nero 39). 이 "위험할 정도로 유능한 장군"의 운명은, 사실 타키투스가 이미 『연대기』 2권에서 게르마니쿠스를 통해 세워 둔 패턴이었어요.
다음 편은 같은 권의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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