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다의 적막이 유대 땅의 마지막 저항을 끝냈다면, 로마에서는 정반대의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승리를 한껏 과시하는 성대한 개선식(트리움프)이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 7권에서 이 개선식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시선으로 기록합니다. "그렇게 많은 전리품과 그렇게 다양한 볼거리가 한 행렬에 모인 적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BJ 7.§132). 이 글에서는 그 화려한 행렬과 잔혹한 마무리, 전쟁 이후 디아스포라로 번진 여파, 그리고 유대전쟁사의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새벽에 시작된 개선식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부자는 전날 밤 이시스 신전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출발했습니다(BJ 7.§123). 월계관을 쓰고 전통적인 보라색 의복을 입은 두 사람은 옥타비아 열주 앞으로 나왔습니다. 원로원과 관리, 기사 계급이 기다리고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의 차남 도미티아누스는 흰 말을 타고 아버지와 형 사이에 섰습니다(BJ 7.§152). 베스파시아누스가 관례대로 제사를 드린 뒤 행렬의 시작을 명했습니다.
이날 도미티아누스가 두 영웅 사이에서 흰 말을 탄 모습은, 훗날 그가 황제가 되어 요세푸스를 보호하게 되는 인연의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개선식은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새 왕조(플라비우스 가)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로마 시민 앞에 각인하는 정치 무대였습니다.
전쟁을 재현한 이동 무대
행렬에는 3~4층 높이의 이동식 무대가 지나갔습니다. 각 무대에는 전투 장면이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 번영하던 도시가 무너지는 장면, 성전이 불타는 장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전쟁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보여주었다. 도망자가 포로로 끌려가고, 집이 적의 머리 위로 무너지는 장면이 실제 전장을 능가하는 생생함으로 재현되었다"(BJ 7.§139-147).
포로 700명도 행렬에 걸어갔습니다. 모두 젊고 키 크고 외모가 뛰어난 자들로, 티투스가 "개선 행렬에 가장 적합한" 자들로 골랐다고 합니다(BJ 7.§118). 자신이 한때 같은 유대인 진영에 있었던 요세푸스가, 이제 로마 쪽에서 이 행렬을 바라보며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무게를 더합니다.
끌려간 메노라
전리품의 절정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이었습니다. 황금 메노라(일곱 가지 등잔대), 금으로 된 진설병 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라 두루마리가 운반됐습니다(BJ 7.§148-150). 이 전리품들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새로 지은 평화의 신전에 봉납됐고, 토라 두루마리와 성전 휘장만은 황제의 궁에 보관하도록 했습니다(BJ 7.§158-162).
이 메노라 운반 장면은 단순한 기록으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로마 포로 로마노에 서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에 새겨져, 오늘날에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그 보물의 형상이 로마의 돌에 박제된 셈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가장 아픈 약탈의 증거가, 로마인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념물이 된 것입니다.
행렬의 끝에서 처형된 적장
행렬이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 앞에 이르자 의전이 잠시 멈췄습니다. 로마의 관례상 개선식의 마지막 순간은 적장의 처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항전의 지도자 시몬 바르 기오라가 목에 밧줄이 감긴 채 포룸으로 끌려와 채찍질을 당한 뒤 처형됐습니다. 또 다른 지도자 요한 기스칼라는 처형 대신 종신형을 받았습니다(BJ 7.§118).
요세푸스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 "적장의 죽음이 선언되자 환호성이 터졌고, 감사 제사가 시작되었다. 제사 후 황제 부자는 궁으로 돌아갔고, 시민들은 잔치를 벌였다 — 그 날은 로마가 적의 정복, 내전의 종식, 평화의 시작을 축하한 날이었다"(BJ 7.§153-157). 한쪽의 멸망이 다른 쪽의 축제가 되는, 제국 의식의 냉정한 문법이었습니다.
디아스포라로 번진 여파
전쟁은 끝났지만 여파는 이산(離散) 유대인 사회로 번졌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카리 잔당이 소요를 일으키자, 총독 루필루스는 오니아스 성전을 폐쇄했습니다(BJ 7.§420-436). 이 성전은 BC 2세기 중엽 대제사장 오니아스 4세가 에피파네스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 세운 유대인 성전으로, 343년간 존속하다 이때 문을 닫았습니다.
북아프리카 키레네에서는 직조공 요나단이 가난한 유대인 2천 명을 이끌고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겠다며 사막으로 나갔다가 로마군에 진압됐습니다. 요나단은 로마로 끌려가 처형되기 전, 고문 속에서 부유한 유대인들을 허위로 고발했고 요세푸스의 이름까지 그 명단에 올렸지만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거부당했습니다(BJ 7.§437-450). 요세푸스가 이 일화를 굳이 자기 책에 기록한 건, 자신의 결백을 증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전쟁사는 여기서 끝납니다. 요세푸스는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 "나는 7권으로 이 역사를 마친다. 정확성에 관해서라면 독자의 판단에 맡기지만, 진실에 관해서라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 이 저술 내내 나는 오직 진실만을 목표로 삼았다"(BJ 7.§454-455). 독립을 향한 투쟁은 성전의 파괴, 예루살렘의 소멸, 마사다의 적막으로 끝났고, 유대인은 이후 오랜 세월을 국가 없는 민족으로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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