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거창한 선언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의 제사를 멈추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매일 드리던 로마 황제를 위한 제사 — 90년 가까이 이어진 그 작은 타협이 깨지는 순간, 유대 대전쟁의 둑이 무너집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2권 마지막 부분은 AD 66년 한 해, 그 숨 막히는 몇 달을 다룹니다. 성전 안의 내전, 시카리 지도자의 등장, 그리고 로마 군단이 군기를 빼앗기고 참패하는 충격적 결말까지. 이제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된 그 분기점을 따라가 봅니다.
멈춰 버린 황제의 제사
예루살렘 성전 지휘관 엘르아살 벤 아나니아스가 결정적 명령을 내렸습니다 — 로마 황제를 위한 일일 제사를 중단하라(BJ 2.§409). 그는 현직 대제사장 아나니아스의 아들이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유대인은 로마 황제와 로마 백성의 안녕을 위해 황소 두 마리와 어린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왔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90년 가까이 이어온 관례였습니다 — 유일신 신앙과 로마 충성을 절묘하게 타협한 제도였습니다. 엘르아살이 이 제사를 중단시킨 것은 사실상 전쟁 선언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전쟁의 진정한 기초, 그 위에 모든 것이 세워졌다"고 정의합니다(BJ 2.§409).
성전 안에서 벌어진 내전
예루살렘 안에서 즉각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온건파(대제사장들, 바리새인 지도자들, 왕당파)는 모든 원로를 불러 모아 설득했습니다 — "외국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없는 일이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조차 이를 금지하지 못했다"(BJ 2.§411-416). 그들은 아그립바 2세에게 3천 기병대를 요청해 상부 시가를 장악하고 성전을 포위했습니다. 과격파 엘르아살은 하부 시가와 성전을 장악했습니다.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아그립바의 병사가 퇴각했고, 과격파가 대제사장의 저택과 문서보관소, 그리고 하스몬 궁을 불태웠습니다 — 문서보관소의 채무 장부를 태운 것은 가난한 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BJ 2.§427).
"왕처럼" 입성한 시카리 지도자
시카리의 지도자 므나헴이 등장했습니다. 갈릴리인 유다의 후손인 므나헴은 헤롯 대왕이 마사다 요새에 비축해둔 무기고를 탈취해 부하들을 무장시킨 뒤, 예루살렘에 "왕처럼" 입성했습니다. 왕의 의복을 차려입고 무장한 열심당원들을 거느린 채 성전에 올라갔습니다(BJ 2.§434). 이 혼란 속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스 — 엘르아살의 아버지 — 가 숨어 있다 발각되어 살해됐습니다(BJ 2.§441).
그러나 엘르아살 파가 므나헴의 왕 노릇에 반발했습니다 — "우리가 로마의 지배를 벗어난 것은 다른 지배자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성전에서 므나헴의 일행을 습격했고, 므나헴은 오벨 언덕에 숨었다가 결국 죽었습니다(BJ 2.§443-448). 므나헴의 친족 엘르아살 벤 야이르는 잔당을 이끌고 마사다로 퇴각했습니다 — 이 사람이 7년 뒤 마사다 집단 자결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맹세가 무너진 자리, 번지는 보복
예루살렘의 로마 수비대는 헤롯의 세 탑에서 저항했습니다. 수비대장 메틸리우스가 "무기와 재산을 모두 넘기면 목숨만 살려 주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하자, 엘르아살이 엄숙한 맹세와 함께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이 성벽에서 내려와 무장을 해제한 순간, 열심당이 달려들어 전원을 죽였습니다. 오직 수비대장 메틸리우스만 "유대인이 되고 할례를 받겠다"고 맹세해 살아남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배신을 "도시가 자기 자신에게 저지른 가장 끔찍한 재앙"이라 기록합니다 — 게다가 그것이 안식일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BJ 2.§450-456).
같은 시각, 카이사레아에서 이방인 주민들이 반유대 폭력을 벌여 2만 명의 유대인이 단 하루 만에 죽었습니다(BJ 2.§457). 유대 전역과 시리아에서 유대인·이방인 간 보복 폭력이 확산됐습니다 — 스키토폴리스, 아스칼론, 다마스쿠스에서 수천 명씩이 희생됐습니다.
빼앗긴 독수리 군기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제12군단(풀미나타)과 보조군, 아그립바 2세의 부대까지 합쳐 3만여 병력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벧호론을 넘어 스코푸스산에 진을 치고 성전 북쪽 성벽까지 접근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5일간 성전을 공격해 거의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 병사들이 성벽 밑에 도달했고, 내부의 온건파가 성문을 열기 직전이었습니다 — 갑자기 이유 없이 퇴각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포위를 계속했더라면, 그 날 도시를 장악해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악한 자들 때문에 이미 성전과 도시에 분노하여, 그 날의 종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BJ 2.§539-540).
퇴각하는 갈루스의 군대는 벳호론 고갯길에서 유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했습니다. 5,300명의 보병과 380명의 기병을 잃었고, 무엇보다 제12군단의 독수리 군기(아퀼라)를 빼앗겼습니다(BJ 2.§555). 군기 상실은 로마군에게 최대의 치욕이었고, 네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치욕적 패배가 유대 전역에서 반란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온건파조차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습니다 — 대제사장 아나누스와 명망가들이 나서서 각 지역 장군을 임명했고, 요세푸스 자신에게는 갈릴리가 맡겨졌습니다(BJ 2.§562-568). 이제 로마는 본격적인 원정군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로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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