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대왕이 죽은 BC 4년부터 유대 대전쟁이 터지는 AD 66년까지, 약 70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 기간이 바로 신약성경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무대입니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던 시절, 사도행전 12장에서 벌레에 먹혀 죽은 헤롯 왕, 갈릴리 유다와 인구조사 — 모두 이 시기의 일입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 2권 전반부는 이 70년을 빠르게 훑으며, 평화로워 보이던 속주가 어떻게 조금씩 전쟁을 향해 미끄러져 갔는지 보여줍니다. 그 첫걸음은 헤롯의 마지막, 소름 끼치는 명령에서 시작됩니다.
헤롯의 마지막 명령
헤롯은 죽기 직전, 유대 각 가문의 장로들을 여리고 경기장에 가두고 자신이 죽는 순간 그들을 전원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 "내 죽음에 유대인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겠다. 그들이 울지 않더라도 온 나라가 울 것이다." 다행히 누이 살로메가 헤롯 사후 이 명령을 어기고 장로들을 풀어주었습니다(BJ 1.§659-666). 그러나 왕국 자체는 이미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장남 아르켈라오스가 유대·사마리아·이두매를 물려받기로 유언에 정해졌으나, 로마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즉위 예식도 전에 아르켈라오스는 성전에서 유월절을 기다리는 군중 앞에 서야 했습니다. 군중은 "헤롯 말년에 처형당한 애국자들을 복권하라, 대제사장을 교체하라, 세금을 감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가 유화책을 쓰다가 끝내 수비대를 투입하자, 성전 뜰에 3천 명의 순례자가 쓰러졌습니다(BJ 2.§10-13). 유월절 첫날, 제사장의 피가 제단의 피와 섞였습니다. 아버지의 잔혹함은 물려받았으되, 아버지의 정치적 수완은 물려받지 못한 것입니다.
로마 직할 속주가 된 유대
로마에서 왕위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아르켈라오스와 동생 안티파스가 각각 사절단을 보내 서로의 왕위를 주장했고, 여기에 유대인 50명의 대표단이 별도로 도착했습니다 — 8천 명의 로마 거주 유대인이 뒤에 서서 이들을 지지했습니다. 대표단의 요구는 놀라웠습니다. "헤롯 왕가의 통치를 아예 끝내고, 유대를 로마 직할 속주로 만들어 주십시오"(BJ 2.§80-92).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의 유언을 대체로 승인하되, 아르켈라오스에게 "왕" 대신 "민족장"(에스나르크)이라는 낮은 칭호만 주는 조건부 승인을 내렸습니다(BJ 2.§93-100).
아르켈라오스는 10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AD 6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합동으로 — 서로 원수지간인 두 집단이 함께 — 아우구스투스에게 탄원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켈라오스를 갈리아의 비엔나로 추방하고, 유대를 로마 총독 직할 속주로 전환했습니다(BJ 2.§111-116). 이것이 60년에 걸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가 새 속주의 재산을 평가하려 인구조사를 실시하자, 갈릴리인 유다가 바리새인 사독과 함께 반란을 선동했습니다 — "이 인구조사는 노예의 멍에다."
유대의 네 종파
요세푸스는 이 시점에서 유대의 4대 종파를 상세히 서술합니다(BJ 2.§119-166).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 그리고 갈릴리인 유다가 창시한 "제4철학". 유다의 원칙은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주인이 없다.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은 노예의 행위다. 자유는 모든 것보다 귀하며,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영광이다." 이 사상이 60년 뒤 전쟁의 불씨가 됩니다.
에세네파에 대해서는 특별히 긴 묘사를 남겼습니다 — 재산 공유, 독신 생활(또는 특정 분파의 결혼 허용), 하얀 옷, 매일의 침례(미크베), 새벽 태양을 향한 기도, 공동 식사, 그리고 놀라운 죽음 앞의 용기. 요세푸스는 "그들은 고통에 웃음으로 답하며, 영혼을 기쁘게 내어준다"고 기록합니다(BJ 2.§152-153). 에세네파의 풍경이 이만큼 자세히 묘사된 것은 고대 문헌 중 유일해서, 1947년 사해 두루마리 발견 이후 에세네파 연구의 1차 사료가 되었습니다.
빌라도와의 충돌
총독들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AD 26-36)는 밤에 몰래 로마 황제 초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에 반입했습니다 — 전임자들은 우상 숭배를 피하려 이 초상을 늘 제거해왔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아침 백성이 카이사레아의 총독 관저로 몰려가 5일간 엎드려 시위했습니다. 빌라도가 군사로 포위하고 "해산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유대인들이 일제히 목을 내밀며 "차라리 우리를 죽이고 율법을 범하지 않게 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가 이 확고함에 감명받아 결국 군기를 철수시켰습니다(BJ 2.§169-174).
두 번째로, 빌라도는 예루살렘 수도 건설을 위해 성전 재정(코르반)을 사용했고,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병사들에게 평복으로 군중에 섞여 신호 때 곤봉으로 치라고 명했습니다. 수백 명이 학살되거나 밟혀 죽었습니다(BJ 2.§175-177). 복음서가 그린 우유부단한 빌라도와, 요세푸스가 그린 강압적 총독은 같은 인물의 양면입니다.
행전 12장의 그 헤롯
AD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헤롯 대왕의 손자 아그립바 1세가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로마에서 궁정 수완을 발휘해 클라우디우스의 즉위를 도운 공로였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3년 반 동안(AD 41-44) 유대 전 지역을 — 할아버지 헤롯 대왕 이후 처음으로 — 통합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AD 44년, 카이사레아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일 축하 공연 중 은실 옷을 입고 햇빛에 비추어 "신처럼" 보이도록 연출했다가, 군중이 "신이여"라고 외치자 벌레가 그의 배를 갉아 5일간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BJ 2.§218-219, AJ 19.§343-352에 더 상세). 요세푸스는 이 죽음을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해석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에피소드입니다.
아그립바 1세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너무 어려서 왕국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유대는 다시 총독 직할령이 되었고, 이후 총독들의 질이 갈수록 악화되어 결국 대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