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유대를 공격하는 동안, 로마 자체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황제 한 명이 자살하고, 1년 사이에 세 명이 더 올랐다 쓰러진 "네 황제의 해"(AD 69). 그 혼란의 끝에서 유대 전선의 노장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릅니다.
흥미로운 건, 동방 전역에 "여기서 세계를 다스릴 자가 나온다"는 오래된 예언이 떠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로마 사가들과 유대 역사가, 그리고 다니엘서가 같은 예언을 서로 다르게 읽은 이 지점을 마지막에 짚어 봅니다.
네로의 자살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끝
AD 68년 6월, 네로 황제가 반란에 직면해 자살했습니다. 갈리아의 빈덱스와 스페인의 갈바가 봉기하자 근위대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네로는 교외 저택으로 도망쳐 스스로 칼을 찌르지 못하고 해방노예의 손을 빌렸고, 마지막 말은 "그리스 문화의 큰 예술가가 사라진다"였다고 전해집니다.
요세푸스는 네로 통치의 상세를 짧게 넘겨요 — "다른 저자들이 충분히 다루었고, 그 대부분이 아첨이나 증오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논평하면서요 (BJ 4.§491-496). 그래도 이 죽음의 무게는 분명히 짚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96년간 이어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여기서 끊어진 것입니다.
네 황제의 해
그 뒤 1년간 세 황제가 차례로 올랐다 쓰러졌습니다 — 요세푸스가 기록한 "네 황제의 해"입니다.
갈바는 73세의 노장으로 원로원의 인정을 받았으나, 인색함과 엄격함으로 인기를 잃고 7개월 만에 포룸에서 근위대에게 살해됐습니다. 그 머리가 창에 꽂혀 전시됐습니다. 뒤를 이은 오토(네로가 그의 아내 포파이아를 빼앗아 원한을 품었던 인물)는 비텔리우스가 게르마니아 군단을 이끌고 남하하자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오토는 병사들의 추가 희생을 막으려 다음 날 아침 자결했고, 요세푸스는 여기에 찬사를 바쳐요 — "불과 3개월의 황제였으나, 자신보다 나라의 평화를 선택했다" (BJ 4.§548-554). 즉위한 비텔리우스는 술과 연회에 빠져 — 하루에 서너 끼의 거대한 잔치를 매일 열어 국고를 탕진했다고 합니다 — 군대의 신뢰를 잃었습니다 (BJ 4.§545-584).
기다림이라는 전략
유대 전선의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혼란을 지켜보며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 공격을 미루고 주변부만 정리했습니다 — 예리코와 페레아를 장악하고, 이두매를 평정하고, 사해 주변 요새와 갈릴리 후방을 확보했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전략적 지연을 흥미롭게 해석합니다 — "그는 하나님이 유대인 스스로를 파멸시키도록 시간을 주는 도구처럼 행동했다. 로마의 공격보다 예루살렘 내부의 내전이 도시를 더 빨리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가장 잔혹한 법칙은, 외부의 적이 내부의 적만 못하다는 것이다" (BJ 4.§366-370). 실제로 그는 AD 68년 여름 이후 약 1년 반 동안 예루살렘 진격을 멈추고, 안에서 벌어지는 3파벌 내전을 밖에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사슬을 도끼로 자른 예언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될 야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별로 뛰어나지 않은 가문에서 태어나 능력으로 경력을 쌓은 군사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동방 군단 지휘관들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AD 69년 7월 1일, 이집트 총독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철학자 필로의 조카이자 유대인 출신 배교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먼저 충성을 선언하고 휘하 두 군단을 그 이름으로 선서하게 했습니다 (BJ 4.§605-621). 며칠 뒤 유대의 베스파시아누스 군대, 이어 시리아 무키아누스의 3개 군단, 그리고 다뉴브의 군단들까지 합류했습니다. 동방 전체가 일시에 그의 편에 섰습니다.
바로 이 순간, 베스파시아누스는 2년 전 요타파타에서 들은 요세푸스의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 "장군이여, 당신이 황제가 될 것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이 아드님 티투스도" (BJ 3.§401). 그는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를 불러 말했습니다 — "이 사람이 예언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를 포로로 두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BJ 4.§622-629). 그러고는 상징적 의식을 행했습니다 — 요세푸스의 쇠사슬을 푸는 대신, 도끼로 잘라내게 한 것입니다. 로마 관습에서 사슬을 도끼로 자르는 것은 "이 사람은 결코 포로였던 적이 없다"는 법적 효과를 가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요세푸스는 자유인이 되어 티투스의 개인 참모가 됐습니다. 비판자들은 이를 "기회주의적 예언"이라 조롱하지만, 요세푸스 자신은 "하나님이 내 입을 빌리셨고, 나는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조국에 항복을 권했을 뿐"이라고 변호합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작
베스파시아누스는 전략을 정했습니다.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원정을 맡기고,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로마의 곡물 공급선을 장악한 뒤 굶주림으로 이탈리아를 굴복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동시에 충복 무키아누스가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직행했습니다.
비텔리우스의 군대는 잔혹한 내전 끝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무너졌고, 비텔리우스 자신은 로마 거리에서 성난 군중에게 끌려다니며 모욕당한 끝에 티베르강에 던져졌습니다. AD 69년 12월,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공식 황제로 선포했습니다 (BJ 4.§654-655). 이렇게 플라비우스 왕조(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도미티아누스)가 시작됐습니다 — 이 왕조는 27년간 이어집니다.
한편 티투스는 4개 군단 — 제5 마케도니카, 제10 프레텐시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때 군기를 빼앗겼던 제12 풀미나타, 제15 아폴리나리스 — 에 동맹군을 합쳐 약 6만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남하했습니다. AD 70년 유월절 직전, 예루살렘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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