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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인가 배신인가 — 역사가 요세푸스가 요타파타 동굴에서 살아남은 방법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운 갈릴리 사령관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가 포로가 되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예언을 건네며, 로마 보호 아래 역사가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읽기 조회 5

유대전쟁사를 쓴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사실 그 전쟁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운 유대 측 사령관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가 어떻게 로마의 보호 아래 책을 쓰는 역사가가 되었는지 따라갑니다.

답은 갈릴리의 한 작은 산성 도시, 요타파타에서 벌어진 일에 있습니다. 47일간의 처절한 포위전, 동굴 속 40명의 집단 자결 약속, 그리고 마지막 두 명 중 하나로 살아남은 한 남자. 유대전쟁사 3권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 항복은 배신인지 생존인지, 그 판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네로가 고른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

AD 66년, 유대 반란을 진압하러 온 시리아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참패하자 로마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네로 황제는 새 사령관을 고르며 묘한 기준을 세웠습니다 — 노련하되, 황제 자리를 넘볼 만큼 명문가는 아닌 사람. 그렇게 낙점된 인물이 노년의 베스파시아누스였습니다 (BJ 3.§4-6).

베스파시아누스는 한때 네로의 노래 경연에서 졸았다는 이유로 잠시 눈 밖에 났던 인물이지만,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서른 번 넘는 전투를 치르고 섬의 절반을 로마 지도에 더한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티투스를 이집트로 보내 제15군단을 인수하게 하고, 자신은 안티오키아에서 제5·제10군단과 동맹군 — 아그립바 2세,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 4세, 나바테아 왕 말쿠스 — 을 합쳐 약 6만 병력을 갈릴리 국경에 모았습니다 (BJ 3.§29-69).

기계처럼 움직인 로마 군대

요세푸스는 이 대군의 행군 순서와 진영 설치법, 훈련 체계를 아주 길게 묘사했습니다 (BJ 3.§70-109). 이건 고대 로마 군제에 관한 현존 최고의 1차 사료 중 하나로, 타키투스나 폴리비우스조차 이만큼 자세히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거의 찬양조로 적었습니다 — "그들에게 훈련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이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다." 식량 보급, 진영 공사, 초소 배치, 나팔 신호, 출정 대형, 교전 전개, 승전 후 재집결까지 모든 게 기계처럼 정확했습니다. 그가 이를 길게 보여준 의도는 분명합니다. 유대인이 이 군대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는 걸 독자에게 설득하려는 거였습니다. 전쟁 전 아그립바 2세가 경고했던 바로 그 내용을, 요세푸스가 글로 시각화한 셈입니다.

갈릴리 사령관 요세푸스, 그리고 내분

이 대군을 막아야 했던 갈릴리 방어 책임자가 바로 서른 살의 제사장 요세푸스 — 이 책의 저자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임시정부에 의해 갈릴리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개 도시의 성벽을 보강하고, 지방 의회를 조직하고, 병력을 로마식으로 훈련했습니다 (BJ 2.§568-584).

문제는 같은 유대인끼리의 갈등이었습니다. 기스칼라의 요한은 요세푸스가 비밀리에 로마와 내통한다며 예루살렘에 네 차례나 공작원을 보내 그를 해임하려 했습니다. 한 번은 600명의 무장 사절단이 요세푸스를 제거하러 갈릴리로 왔지만, 그가 미리 낌새를 채고 역공으로 무산시켰습니다 (BJ 2.§585-632). 이 내부 갈등이 방어 준비를 크게 갉아먹었습니다.

로마 대군이 AD 67년 봄 갈릴리에 들이닥치자 마을들이 낙엽처럼 떨어졌습니다. 친로마 성향의 헬레니즘 도시 세포리스는 처음부터 항복했고 (BJ 3.§30-34), 요세푸스의 저항군 대부분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선발대만 보고도 흩어졌습니다. 요세푸스는 요새 도시 요타파타로 물러나 최후의 방어를 택했습니다. 47일간의 포위전이 시작됐습니다.

끓는 기름과 미끄러운 풀 — 요타파타 방어

요세푸스는 자신의 방어 전술을 아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로마군이 파성추를 들이대자 밀짚 자루를 밧줄에 달아 충격을 흡수했고, 파성추 머리에 밧줄을 걸어 위로 끌어올려 방향을 틀어 버렸습니다 (BJ 3.§220-228).

두 번째 공격 땐 끓는 기름을 성벽에서 부었습니다. "기름은 물보다 오래 뜨거웠고, 쇠와 피부 사이로 흘러 들어 병사들이 갑옷을 벗지도 못한 채 발광하며 뛰었다"고 묘사합니다 (BJ 3.§271-275). 이어서 삶은 호로파를 성벽 판자와 공성 사다리에 발라 두자, 로마 병사들이 거기서 미끄러져 굴러떨어지거나 사다리 위에서 서로 깔렸습니다 (BJ 3.§277-281).

하지만 성안의 식량은 줄어만 갔습니다. 요세푸스는 항복 거부 연설로 사기를 다잡았고, 때로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씻은 채 거리를 거닐며 "우리는 굶지 않는다"고 로마 첩자들에게 과시하는 기만술까지 썼습니다. 그러나 47일째 밤, 한 탈영병이 결정적 비밀을 흘렸습니다 — 새벽 마지막 경비 시간에 지친 보초들이 졸고, 마침 아침 안개가 도시를 덮어 시야를 가린다고. 티투스가 정예병을 이끌고 성벽에 오르며 요타파타가 함락됐습니다 (BJ 3.§316-339). 요세푸스는 사상자 약 4만, 포로 1,200명이라 적었는데, 이 작은 도시 규모로는 과장이라고 현대 학자들은 봅니다 (BJ 3.§338).

동굴 속 제비뽑기,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요세푸스 자신은 유력 인사 40명과 함께 도시의 비밀 지하 저수조로 내려가 숨었습니다. 사흘 만에 한 여인의 제보로 위치가 발각됐고, 베스파시아누스가 "항복하면 목숨을 살리겠다"는 사절을 보냈습니다. 동료들은 격분하며 집단 자결을 주장했습니다 —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살이 더 명예롭다."

요세푸스는 긴 연설로 맞섰습니다 — "하나님이 영혼을 주셨으니 돌려드릴 시간도 그분이 정하신다. 자살은 영웅이 아니라 겁쟁이의 행동이다" (BJ 3.§361-382). 하지만 다수의 압력에 밀렸습니다. 결국 제비를 뽑아 차례대로 서로를 죽이는 방식이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신의 섭리인지 우연인지" 마지막 두 명 중 하나로 살아남아, 남은 한 명을 설득해 함께 항복했습니다 (BJ 3.§387-391). 비평가들은 그가 제비 순서를 수학적으로 계산해 마지막 자리를 확보했을 거라고 의심합니다.

목숨을 건 예언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끌려간 요세푸스는 독대를 청한 뒤 대담한 말을 던졌습니다 — "장군이여, 당신이 곧 황제가 될 것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이 아드님 티투스도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를 더 엄중히 가두시되, 처형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대변자를 처형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BJ 3.§400-402).

목숨을 건 도박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살기 위한 계략으로 의심했지만, 요세푸스의 과거 예언이 요타파타 함락 시점까지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기록을 확인하고 처형을 보류했습니다. 요세푸스는 포로로 묶인 채였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전황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2년 뒤 AD 69년 베스파시아누스가 정말로 황제가 되자, 그는 요세푸스의 사슬을 도끼로 잘라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만들어 석방했습니다.

한편 기스칼라의 요한은 밤에 도시를 버리고 추격하는 티투스를 따돌린 채 예루살렘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열심당의 지도자가 됩니다. 갈릴리에서 갈라진 두 사람의 길 — 요세푸스는 로마의 보호 아래 역사가가 되고, 요한은 예루살렘의 파괴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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