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는 보통 AD 66년의 대전쟁부터 시작할 것 같지만, 사실 1권은 그보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쟁의 뿌리를 보여주려고 마카비 혁명부터 헤롯 대왕의 죽음까지를 빠른 호흡으로 압축한 것입니다.
그 첫 장면은 무척 강렬합니다. 한 산골 노제사장이 칼을 들고, 셀레우코스 제국에 맞서 봉기를 외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피로 세운 독립이, 100년 뒤 어떻게 다시 피로 무너지는지 — 1권 전반부의 이야기를 따라가 봅니다.
성전 위에 세워진 이교 제단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 성전 위에 이방의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교를 뿌리째 뽑으려 한 것입니다. 성전 안에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BJ 1.§34).
박해는 끔찍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자, 율법서를 소유한 자 — 모두 사형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은 아기와 함께 성벽에서 내던져졌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시기를 "유대 민족이 겪은 가장 극심한 재앙"이라고 기록합니다.
모디인의 노제사장, 봉기를 외치다
그러나 예루살렘 북서쪽, 모디인이라는 작은 마을에 한 늙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맛타티아스. 왕의 관리가 이교 제사를 강요하자, 한 유대인이 나서서 제사를 지내려 했습니다. 분노로 떨던 맛타티아스는 그 유대인을 제단 위에서 베고, 왕의 관리까지 죽인 뒤 외쳤습니다 — "율법에 열심이 있고 언약을 지키려는 자는 나를 따르라!"(BJ 1.§36).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맛타티아스는 곧 죽으며 유언을 남겼습니다 — 셋째 유다를 군사 지휘관으로, 둘째 시몬을 조언자로 삼으라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별명은 "마카비", 곧 망치라는 뜻입니다. 유다 마카비는 산악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의 천재였습니다. 벳호론 고개에서 셀레우코스 장군 세론의 군대를 기습해 격파했고, 엠마우스에서는 야간 행군으로 적진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수적으로는 늘 열세였지만, 정규군은 게릴라전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성전 정화와 빛의 축제
마침내 유다는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했습니다. 이교 제단을 허물고, 새 돌로 제단을 쌓고, 새 기구를 만들어 봉헌 제사를 드렸습니다(BJ 1.§39에서는 성전 탈환을 간략히 기술하고, 상세한 정화 과정은 AJ 12.§316-326에 기록돼 있습니다). 3년간 꺼져 있던 성전의 등잔에 다시 불이 켜졌습니다. 이것이 하누카 — "봉헌" — 축제의 기원입니다.
요세푸스는 이 축제를 "빛의 축제"(Φῶτα)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름의 유래로 "우리에게 이 자유가 기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AJ 12.§325).
형제들의 죽음, 하스몬 왕조의 부상
영광은 짧았습니다. 유다 자신은 전장에서 죽었습니다(BC 160). 동생 요나단이 지휘를 이어받아, 셀레우코스 내전을 이용한 외교술로 대제사장직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장군 트리폰이 우정을 가장해 요나단을 프톨레마이스로 초대한 뒤, 호위병 1,000명을 학살하고 요나단을 체포해 살해했습니다(BJ 1.§49).
마지막 형제 시몬이 셀레우코스 데메트리우스 2세로부터 조세 면제를 확보해 사실상의 독립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시몬조차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연회에서 살해당했습니다 — 술에 취한 시몬을 사위가 칼로 찌른 것입니다(BJ 1.§54).
시몬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가 이 위기를 넘기고 왕위에 올라 하스몬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이두매(에돔)를 정복하고, 주민 전체에게 할례를 받고 유대 율법에 따라 살 것을 강요했습니다(BJ 1.§63). 거부하면 추방이었습니다. 이두매인들은 강제로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아무도 몰랐지만, 이 결정이 100년 뒤 유대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는 씨앗이 됩니다 — 바로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 가문이 유대의 실권을 잡고, 그의 아들 헤롯이 왕이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800명, 그리고 균형의 붕괴
힐카누스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하스몬 최초로 "왕" 칭호를 썼지만,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이고 동생을 의심해 살해한 뒤 1년 만에 병으로 죽었습니다(BJ 1.§71-84). 그 동생 알렉산더 얀나이오스가 형수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해 왕위에 올랐습니다.
얀나이오스는 군사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지만, 바리새인과의 내전에서 반대파 800명을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얀나이오스는 첩들과 연회를 즐기며 그 처형을 지켜보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자들의 아내와 자녀를 그 눈앞에서 목 베었습니다(BJ 1.§97). 이 잔혹함에 반대파 8,000명이 밤에 도주했습니다.
얀나이오스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여왕으로서 9년간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두 아들 — 온순한 힐카누스 2세와 야심 찬 아리스토불루스 2세 — 이 이미 권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살로메가 병들어 눈을 감자, 균형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피로 세운 왕조가, 이제 스스로의 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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