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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오기 전에 — 예루살렘이 스스로를 파괴한 내전의 기록

로마가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기 전에, 유대인이 먼저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이게 유대전쟁사 4권의 핵심 주장입니다.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읽기 조회 1

로마가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기 전에, 유대인이 먼저 예루살렘을 무너뜨렸습니다. 이게 유대전쟁사 4권의 핵심 주장입니다.

요세푸스는 도시의 멸망을 외부의 칼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에서 찾습니다. 갈릴리가 함락된 뒤 예루살렘으로 흘러든 강경파, 추첨으로 세워진 무식한 대제사장, 거짓 고발로 불려 온 2만 이두매 군대, 그리고 한밤의 폭풍우 속에서 시작된 학살 — 이 비극의 연쇄를 따라가 봅니다.

갈릴리에서 도망친 요한, 예루살렘을 흔들다

갈릴리 최후의 저항 도시 기스칼라가 함락될 무렵, 그곳 수장 요한은 "안식일에는 싸울 수 없다"며 티투스를 속여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고는 밤중에 여자와 아이들을 끌고 예루살렘으로 달아났습니다 (BJ 4.§106-120). 추격하던 로마군에 많은 피난민이 버려져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요한은 뻔뻔하게도 선전을 폈습니다. "갈릴리는 끝났다"고 절규하는 피난민들 앞에서 오히려 "로마군은 약하다, 내가 기스칼라를 지켜냈다"고 떠들며 열심당(제일롯)을 규합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도시의 새 권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추첨으로 세운 대제사장

열심당은 기존 대제사장 체제를 통째로 뒤엎었습니다. 전통적 대제사장 가문 대신 "제사장 가문이라면 누구든" 추첨으로 세우기로 하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파니아스라는 무식한 돌쟁이를 뽑았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장면을 가장 경멸적으로 적었습니다 — "그를 데려다 의복을 입히고 해야 할 일을 가르쳤다. 그것은 끔찍한 불경이었으나 구경꾼들에게는 희극이었다. 파니아스는 대제사장 예복을 입고 어쩔 줄 몰라 당황했고, 전직 대제사장들은 멀리서 보며 율법의 훼손에 눈물을 흘렸다" (BJ 4.§155-157). 요세푸스에게 이 한 장면은 오래된 제사장 질서의 파산을 상징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누스의 반격

온건파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맞섰습니다. 그는 시민들을 성전 광장에 모아 놓고 긴 연설을 했습니다 — "우리가 로마에 저항한 것은 자유를 위해서였지, 이 살인자들에게 무릎 꿇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BJ 4.§160-192).

이 호소로 6천 명의 민병대가 모였고, 한때 열심당을 성전 안쪽 구역에 가두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BJ 4.§196-207). 성전 구역의 격렬한 접전 끝에 아나누스는 승리 직전까지 다가갔습니다. 도시의 질서가 회복되는 듯 보였습니다.

한밤의 폭풍우와 이두매인의 난입

그런데 요한이 배신했습니다. 그는 아나누스 진영에 거짓 사절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비밀리에 이두매 지방에 사람을 보내 "아나누스가 도시를 로마에 팔아넘기려 하니 신속히 구원하라"고 거짓 고발했습니다. 이두매인 2만 명이 무장하고 달려왔지만, 아나누스가 성문을 닫아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밤,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 "그런 폭풍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천둥과 번개가 끊이지 않았고, 지진이 동반되었으며, 강풍과 호우가 성벽을 때렸다. 경건한 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의 징조라고 해석했다" (BJ 4.§286-288). 보초들이 비바람을 피해 안으로 물러난 사이, 열심당 몇 명이 몰래 성전 문의 빗장을 톱으로 잘라 이두매인을 들였습니다.

난입한 이두매인들이 아나누스와 동료 대제사장 예수 벤 가말라를 살해했습니다. 시신은 벌거벗긴 채 거리에 내던져졌고 매장이 금지됐습니다 (BJ 4.§314-318).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 전체에서 가장 감정적인 논평을 여기 남깁니다 — "어제까지 최고 대제사장의 예복을 입고 온 로마 세계가 예배하는 도시의 중심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벌거벗은 채 개들의 먹이가 되어 도시 한복판에 던져져 있다. 내 생각에 예루살렘의 파멸은 아나누스가 죽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BJ 4.§318-325). 그 밤의 학살로 8,500명이 죽었습니다 (BJ 4.§313).

시몬 바르 기오라와 3파전의 도시

이두매인들은 곧 자기들이 속았음을 깨달았습니다. 모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한 부유한 청년이 밖에서 곧장 살해되자, 그들은 혐오감에 대부분 도시를 떠났습니다 (BJ 4.§345-353).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열심당은 무죄한 자 2천 명을 감옥에서 끌어내 "재판"이라는 이름의 처형을 이어 갔습니다.

그 무렵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두매 지방에서 독자적 군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풀어 주고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하층민의 영웅이 됐습니다 (BJ 4.§507-513). 아내가 열심당에게 인질로 잡히자, 그는 성벽으로 몰려가 "인질의 손발을 잘라 그 몸을 쌓아 탑으로 세우겠다"고 위협해 아내를 되찾았는데 — 요한 기스칼라조차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요한의 공포정치에 시달리다 못한 예루살렘 시민들은 결국 자기 적을 불러들이는 자포자기의 선택을 했습니다. 대제사장 마티아스가 성문을 열어 시몬을 도시에 초청한 것입니다 (BJ 4.§573-577). 이제 예루살렘은 요한(성전 안쪽 구역)과 시몬(상부 도시)의 내전으로 이중 파괴됐습니다. 곧 엘르아살 벤 시몬이 성전 가장 안쪽에서 제3의 분파를 세우며 3파전이 됐습니다 (BJ 4.§224-225). 각 파가 서로를 치면서 성전 안뜰까지 유대인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베스파시아누스

한편 로마도 흔들렸습니다. AD 68년 6월 네로가 자살하고, 1년 사이 세 황제(갈바·오토·비텔리우스)가 차례로 올랐다 쓰러지며 모두 살해됐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AD 69년 7월 1일, 이집트 총독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유대인 출신 배교자)가 먼저 알렉산드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단을 그 이름으로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뒤이어 유대와 시리아의 군단이 합류했습니다 (BJ 4.§601-621).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원정엔 친구 무키아누스를 보내고, 자신은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해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장악했으며, 아들 티투스에게 유대 원정을 맡겼습니다. 다음 편에서 그 황제 즉위의 전모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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