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하스몬 왕조는 두 형제 —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 의 권력 다툼으로 휘청였습니다. 그런데 형제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 밖에서 누군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두매 출신의 노련한 정치가 안티파테르, 다른 하나는 동방을 휩쓸던 로마 장군 폼페이였습니다. 이 편은 유대가 어떻게 로마의 속국이 되고, 이두매인 가문이 어떻게 유대의 실권을 쥐게 되는지를 다룹니다. 헤롯 대왕이 등장하기 직전의 무대입니다.
단 15일 만에 무너진 형
살로메 여왕이 눈을 감자, 차남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단 15일 만에 군대를 모아 형 힐카누스 2세를 몰아냈습니다. 예리코 근처 전투에서 힐카누스의 병사 대부분이 아리스토불루스 편으로 탈영했습니다(BJ 1.§121). 힐카누스는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모두 내놓고, 성전 안 아리스토불루스의 저택에서 사실상 연금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이 시점에 결정적 인물이 움직입니다. 안티파테르, 이두매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안티파스는 알렉산더 얀나이오스에 의해 이두매 전체의 총독으로 임명된 인물로, 가자와 아스칼론의 아랍인 세력, 그리고 나바테아 왕실과 깊은 인맥을 구축해둔 상태였습니다(BJ 1.§123). 안티파테르는 이 인맥을 아버지보다 훨씬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꼭두각시를 세우려 한 킹메이커
안티파테르는 무기력한 힐카누스를 찾아가 속삭였습니다 — "당신이 정당한 왕이고, 동생은 찬탈자입니다. 이대로 있으면 목숨도 위험합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파테르의 진짜 동기는 힐카누스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자신이 실권을 잡는 것이었습니다(BJ 1.§124).
그는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3세를 설득해 5만 명의 군대를 빌렸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병사들이 다시 탈영하면서, 아리스토불루스는 성전 산으로 쫓겨 농성하게 됐습니다.
형제 간 내전이 본격화되자, 양쪽 모두 마침 동방 원정 중이던 로마 장군 폼페이에게 사절을 보냈습니다. 요세푸스는 세 번째 사절단도 기록합니다 — 왕가와 무관한 유대 민중의 대표단이었는데, 이들은 "왕정을 아예 폐지하고 대제사장 통치로 돌아가자"고 요청했습니다(BJ 1.§131). 폼페이는 판단을 미뤘습니다. 시간은 로마의 편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무너진 성전
아리스토불루스 측이 자신의 요새 알렉산드리움에서 거부 자세를 보이자, 폼페이는 이를 빌미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힐카누스 파가 성문을 열었으나, 아리스토불루스 파는 성전 산에서 농성했습니다. 3개월간의 포위 끝에 —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인 1만 2천 명이 죽었습니다(BJ 1.§150). 결정적으로, 로마군은 안식일에 공격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에는 공격을 받지 않는 한 싸우지 않는다는 걸 알고, 그날 공성탑을 쌓아올린 것입니다(BJ 1.§146).
기원전 63년, 성전이 함락됐습니다. 폼페이는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한 번만 들어가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그 방까지입니다. 요세푸스는 기록합니다 — 성전 안에는 황금 탁자와 거룩한 등잔대, 제기와 많은 향료가 있었고 보물이 약 2천 탈란트나 있었으나 "폼페이는 이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BJ 1.§152-153).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인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지성소에 신상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그들을 맞은 것은 "빈 자리와 공허한 비밀"(vacuam sedem et inania arcana)이었다는 기록입니다(Tacitus, Hist. 5.9).
로마의 속국이 되다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힐카누스는 대제사장으로 복위되었으나 왕 칭호는 박탈당했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두 아들과 두 딸과 함께 포로로 로마에 끌려갔습니다 — 폼페이의 개선식 행렬에서 전시되기 위해서요(BJ 1.§157-158).
이후 시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유대를 5개 행정구로 분할해 직접 관리했습니다(BJ 1.§170). 크라수스는 폼페이가 손대지 않았던 성전 보물 2천 탈란트를 모두 약탈하고, 무게 300미나의 황금 기둥까지 가져갔습니다(BJ 1.§179). 그러나 그는 파르티아 원정에서 전사했고, 이어 카시우스가 시리아를 장악합니다.
사막을 가로질러 카이사르를 구하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안티파테르는 재빠르게 카이사르 편에 섰습니다. 카이사르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당했을 때, 안티파테르가 유대 병사 3천 명을 이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구원했습니다. 전투에서 안티파테르 자신도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합니다(BJ 1.§193).
카이사르는 보답했습니다 — 안티파테르를 유대 총독(에피트로포스)으로 임명하고, 유대인에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허가했습니다(BJ 1.§199-200). 마침내 이두매인이 유대의 실권을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두 아들을 요직에 앉혔습니다 —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에, 차남 헤롯을 갈릴리에 배치했습니다. 25세의 청년 헤롯은 부임하자마자 도적 수장 히스키야를 즉결 처형해 로마의 호감을 사는 동시에, 유대 산헤드린의 분노를 샀습니다. 재판 없이 유대인을 처형한 것은 유대법 위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 대담한 청년을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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