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이 불타 재가 된 뒤에도, 사해 서쪽의 한 요새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마사다(Masada)입니다. 로마군이 유대 전역을 평정하는 동안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마지막 거점이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 7권은 이 요새의 최후를 기록합니다. 960명이 가족과 함께 절벽 위에서 농성하다가, 함락 직전 자유인으로 죽기를 택한 이야기입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 그리고 요세푸스가 어떻게 그 밤의 일을 알게 됐는지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끝까지 남은 세 요새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유대 땅에는 세 요새가 남아 있었습니다 — 헤로디움, 마카이루스, 그리고 마사다입니다. 헤로디움은 쉽게 항복했고(BJ 7.§163), 마카이루스는 시카리 지도자 중 한 명인 엘리에셀이 로마에 붙잡히면서 수비대가 항복 조건을 협상해 함락됐습니다(BJ 7.§190-209). 마지막 남은 것이 마사다였습니다.
이곳을 지킨 이들은 시카리(sicarii), 곧 '단검파'라 불린 강경 분파였습니다. 지휘관은 엘르아살 벤 야이르 — 갈릴리인 유다의 후손으로, AD 66년 예루살렘에서 시카리를 이끌다가 요한 기스칼라의 공격에 밀려 마사다로 퇴각한 인물입니다(BJ 2.§447, BJ 7.§253). 이들은 예루살렘 함락 후에도 주변을 습격했고, 엔게디에서 유월절을 지내던 유대인 700명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BJ 4.§402-404). 요세푸스는 이들을 결코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 역사상 가장 불순한 무리"라 혹평합니다. 마사다 이야기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복잡한 비극인 이유입니다.
함락 불가능한 요새
마사다는 헤롯 대왕이 약 40년 전 자신의 피난처로 지은 요새입니다. 사해 옆 400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 위, 꼭대기 평지는 약 600×300미터 크기였습니다. 두 개의 궁전(북쪽의 3층 계단형 궁전과 서쪽의 대궁전), 목욕탕, 대형 창고, 그리고 12개의 거대한 빗물 저수조가 있어 수천 명이 수년간 농성할 수 있었습니다(BJ 7.§275-303).
요세푸스의 묘사는 놀랄 만큼 정확합니다. 그는 "마사다로 오르는 길은 뱀의 길이라 불렸으니, 좁고 꾸불꾸불하여 발 놓을 곳을 찾기 어렵고, 길을 벗어나면 낭떠러지뿐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습니다(BJ 7.§282). 흥미롭게도 1960년대 이가엘 야딘의 고고학 발굴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확인했습니다. 궁전도, 저수조도, 창고도 그가 쓴 대로 거기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공이 결합된 이 요새는 이론상 함락이 불가능했습니다.
흙으로 절벽을 메운 로마군
AD 73년경, 로마 제10군단(프레텐시스)의 지휘관 플라비우스 실바가 마사다를 포위했습니다. 그는 요새 둘레에 8개의 야영지를 세우고 그것들을 포위벽으로 연결했습니다(BJ 7.§275-277). 이 포위 공사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위성 사진으로 선명하게 보이는데,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포위전 유적입니다.
정면 공격은 불가능했으므로 실바는 서쪽 절벽의 자연 돌출부 위에 거대한 흙 경사로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 포로와 노예들이 돌과 흙을 나르며 수개월이 흘렀습니다. 경사로가 꼭대기에 닿자 그 위에 돌 플랫폼을 깔고, 쇠로 보호된 공성탑을 세웠으며, 탑 안의 파성추가 성벽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돌 성벽은 곧 뚫렸지만, 안쪽엔 시카리가 흙과 나무로 쌓은 두 번째 내벽이 있었습니다 — 나무가 충격을 흡수해 오히려 더 단단해졌습니다. 실바는 화공을 명했고, 처음엔 남풍이 불어 불이 로마군 쪽으로 돌아왔으나 갑자기 북풍으로 바뀌어 유대인의 내벽을 태웠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를 두고 "하나님이 이 바람을 돌리셨다"고 해석합니다(BJ 7.§304-319). 실바는 다음 날 아침 최종 공격을 예고하고 병사들을 쉬게 했습니다.
엘르아살의 두 연설
함락이 임박한 그 밤, 엘르아살은 남자 전원을 모아 두 차례 긴 연설을 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그 자리에 있던 생존자의 증언에 근거한 재구성입니다.
첫 번째 연설은 자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결한 친구들이여, 우리는 오래전부터 결심한 것이 있다 — 로마에도, 하나님 외 다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그 결심을 실행할 시간이 왔다. 우리의 아내가 겁탈당하는 것을, 아이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보지 말자.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난 자유민으로 죽어야 한다"(BJ 7.§323-336).
동료들이 그 무게 앞에 망설이자 엘르아살은 두 번째 연설을 했습니다. 이번엔 영혼의 불멸에 관한 철학적 논증이었습니다. 인도의 현자들과 그리스 철학을 인용하며 그는 말했습니다 — "몸은 영혼의 감옥일 뿐이다. 잠잘 때 영혼이 몸을 떠나 자유롭게 떠돌듯, 죽음은 영혼을 영원히 해방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몸의 감옥을 사랑하는 것이다"(BJ 7.§341-388). 이 두 연설은 요세푸스의 가장 긴 수사학적 작품 중 하나로, 스토아 철학과 인도 사상이 뒤섞인 흔적이 뚜렷합니다. 실제 엘르아살의 말이라기보다 요세푸스가 고전 수사학의 관습을 따라 다듬은 것에 가깝습니다.
적막한 요새, 그리고 두 증인
960명은 각자 가족을 끌어안았습니다. 그 후 남자들은 제비를 뽑아 10명을 정했고, 그 10명이 나머지를 처리했습니다. 남은 10명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명을 정했고, 마지막 한 사람이 궁전 곳곳에 불을 지른 뒤 자신도 쓰러졌습니다(BJ 7.§394-397). 단 한 가지, 식량 창고만은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겼습니다 — "이것은 우리가 기근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심한 대로 노예보다 죽음을 택했음을 로마인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다"(BJ 7.§397).
다음 날 새벽, 로마군이 경사로를 올라 돌파구를 넘었습니다. 함성을 지르며 돌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요새 안은 완전한 적막이었습니다. 타오르는 궁전의 불뿐이었습니다. 처음엔 함정을 의심했으나, 곧 진상을 알게 됐습니다. 저수조 깊은 곳에 숨어 살아남은 여자 두 명과 아이 다섯 명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요세푸스는 한 여인이 "남들보다 지성과 교양이 뛰어났기에 엘르아살의 두 연설을 거의 정확히 기억해 전할 수 있었다"고 적습니다(BJ 7.§399-401). 우리가 그 밤의 연설을 아는 건 바로 이 여인의 증언 덕분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승리의 함성 대신 침묵으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 "그들은 적에 대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공포 앞에서 보여준 이 결의와 흔들림 없는 죽음의 선택을 어떻게 칭찬해야 할지 몰랐다"(BJ 7.§406-407). 마사다가 함락된 때는 AD 73년 유월절 무렵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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