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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서 형제를 죽이던 도시 — 요세푸스가 목격한 예루살렘 포위전

예수가 성전을 가리키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고 말한 그 예언이, 정확히 어떻게 이뤄졌는지 우리는 한 유대인 역사가의 눈을 통해 거의 시간 단위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입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유대 전쟁 초기엔...

2026년 5월 30일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읽기 조회 1

예수가 성전을 가리키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고 말한 그 예언이, 정확히 어떻게 이뤄졌는지 우리는 한 유대인 역사가의 눈을 통해 거의 시간 단위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입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유대 전쟁 초기엔 갈릴리 사령관이었다가 로마로 넘어가, AD 70년 예루살렘 포위전을 로마 진영 한복판에서 직접 지켜본 인물입니다.

그가 쓴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 5권은 AD 70년 봄, 티투스의 군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로마군의 공성이 아닙니다. 성벽 바깥에 세계 최강의 군대가 진을 친 그 순간에도, 성 안에서는 유대인 세 파벌이 서로를 죽이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비극의 절반은 도시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성 안의 세 파벌, 그리고 불타는 곡식

티투스가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은 이미 내전 중이었습니다. 시몬 바르 기오라가 1만 5천 병력으로 상부 도시와 성벽 대부분을, 요한 기스칼라가 6천으로 성전과 성전 산을, 엘르아살 벤 시몬이 가장 과격한 2,400명의 열심당으로 성전 가장 안쪽 신성한 구역을 점거하고 있었습니다(BJ 5.§248-257). 같은 성전 안에서 두 파벌이 서로에게 화살과 창을 쏘았고, 제사를 드리러 온 순례자에게까지 화살이 날아갔습니다. 요세푸스는 "제사장이 제단에서 쓰러져 제물의 피와 자신의 피가 섞였다"고 기록합니다(BJ 5.§17).

AD 70년 유월절, 엘르아살이 성전 문을 열어 순례자를 받아들이는 순간을 요한이 노렸습니다. 요한의 부하들이 무기를 겉옷 안에 숨기고 순례자에 섞여 들어가, 안에서 칼을 빼어 엘르아살 파를 기습했습니다(BJ 5.§99-105). 세 파벌이 두 파벌로 줄었지만, 시몬과 요한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습니다. 요세푸스는 이 대목에서 통탄합니다 — "이 방화로 수년간 도시를 먹일 수 있었던 양식이 며칠 만에 재가 되었다. 훗날 수만 명이 굶어 죽는 기근의 원인을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다"(BJ 5.§24-26). 포위가 본격화되기도 전에, 도시는 자기 손으로 굶주림을 예약한 셈이었습니다.

눈 덮인 산처럼 빛나던 성전

5권에는 후대 고고학자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대목이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함락 직전의 예루살렘 지형과 건축을 상세히 기록한 부분입니다(BJ 5.§136-247). 세 겹의 성벽(헤롯의 성벽, 아그립바 1세의 성벽, 옛 다윗-솔로몬 성벽), 히피쿠스·파사엘·마리암네라 불린 세 개의 높은 탑, 헤롯의 왕궁, 그리고 안토니아 요새. 이 서술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사라진 도시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묘사는 특히 인상적입니다. 요세푸스는 "멀리서 보면 눈 덮인 산처럼 보였다 — 금이 덮이지 않은 부분의 돌이 눈부시게 하얗고, 해가 뜰 때 금박이 불꽃처럼 반사되어 눈을 멀게 할 지경이었다"고 적습니다(BJ 5.§222-223). 이 찬란한 건물이 불과 몇 달 뒤 잿더미가 된다는 걸 알고 읽으면, 이 묘사 전체가 거대한 비가(悲歌)처럼 들립니다.

파성추와 공성탑, 그리고 무너지지 않는 도시

티투스는 체계적으로 공성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바깥쪽 성벽은 파성추와 공성탑을 동원해 15일 만에 돌파했고(BJ 5.§275-302), 두 번째 성벽은 5일 만에 뚫었습니다(BJ 5.§317-331). 그러나 두 번째 성벽 안으로 들어간 로마 병사들이 베제타 구역의 좁은 골목에서 역습당해 나흘 만에 다시 성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티투스가 친히 방어선을 재조직해 가까스로 탈환했습니다.

도착 초기에 티투스 본인도 죽을 뻔했습니다. 부대 배치를 살피러 600 기병만 데리고 정찰을 나갔다가 성전 북쪽 계곡에서 튀어나온 유대인 돌격대에 포위된 것입니다. 갑옷도 투구도 방패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요세푸스는 "그 날 그의 옆에서 두 명이 쓰러지고 그의 말 뒤로 수많은 창이 스쳤으나, 단 한 번도 맞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이 그를 지키시는 것 같았다"고 기록합니다(BJ 5.§52-66). 이런 "신의 가호" 표현은 요세푸스의 해석이지, 객관적 사실 주장으로 읽을 건 아닙니다. 그는 전쟁의 흐름을 신의 뜻으로 풀이하는 사가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외친 항복 권유

가장 묘한 장면은 요세푸스 자신이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티투스의 명으로, 요세푸스가 성벽 아래에 서서 조상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항복을 권유하는 연설을 합니다. 그는 유대 역사 전체를 끌어왔습니다 — "아브라함 때, 이삭 때, 야곱 때부터 하나님은 무기가 아니라 기도와 의로움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셨다. 히스기야가 산헤립 앞에서 기도만 드렸을 때 18만 5천 명이 하룻밤에 쓰러졌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은 성전 안에서 형제를 죽이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로마 편에 서 계시다 — 오늘 당신들에게서 떠나 저들에게 가신 것이다. 항복하라. 성전을 구원하라"(BJ 5.§361-419).

돌아온 건 돌과 화살과 저주뿐이었습니다. 몇 주 뒤 요세푸스는 성벽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구조됩니다(BJ 5.§541). 이 연설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대목입니다. 약 400년 전 "바빌론에 항복하라"고 외치다 반역자로 몰린 예언자 예레미야와, AD 70년 "로마에 항복하라"고 외치다 변절자로 몰린 요세푸스가 거울처럼 겹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레미야의 히스기야 일화를 굳이 끌어온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포위벽과 십자가 — 봉쇄가 시작되다

티투스는 결정적인 수를 뒀습니다. 예루살렘 전체를 포위벽(키르쿰발라티오)으로 둘러버린 겁니다. 약 7km(39 스타디온)의 벽과 13개 초소를, 전군이 경쟁하듯 단 3일 만에 완성했습니다(BJ 5.§499-511). 완전한 봉쇄였습니다. 식량 보급이 끊기자 기근이 시작됐습니다. 도시 안에서는 매일 수백 명이 굶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가죽 띠와 샌들과 낡은 건초까지 씹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잡힌 사람들은 성벽이 보이는 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됐습니다. 하루에 500명씩 여러 날이었습니다. 요세푸스는 "나무가 부족하여 십자가가 모자랐고, 십자가가 부족하여 공간이 모자랐다"고 기록합니다(BJ 5.§449-451). 성 안의 방어군은 이 광경을 성벽에서 보고도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안토니아 요새에서는 로마군이 세운 네 개의 공성탑을, 요한 기스칼라가 지하에 갱도를 파서 기초를 불태우자 한꺼번에 무너뜨렸습니다(BJ 5.§466-472). 교착 상태. 성전의 최후를 향해 시간만 무겁게 흘러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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