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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네 끼, 먹기 위해 토한 황제 — 비텔리우스는 어떻게 제국을 "씹어 삼켰나"

서기 69년 봄, 오토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네 황제의 해"의 세 번째 황제가 권좌를 차지했어요. 게르마니아 군단이 세운 거구의 사령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였습니다. 그런데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2권에서 이 황제를 진단하는 데 쓴 단어는 단 두 개예요 —...

2026년 5월 30일 타키투스 『역사』 읽기 조회 1

서기 69년 봄, 오토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네 황제의 해"의 세 번째 황제가 권좌를 차지했어요. 게르마니아 군단이 세운 거구의 사령관, 아울루스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였습니다. 그런데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2권에서 이 황제를 진단하는 데 쓴 단어는 단 두 개예요 — pigrum et iners, "게으르고 무기력하다."

흥미로운 건, 갈바도 오토도 각자의 방식으로 실패했지만, 비텔리우스는 아예 다른 종류의 실패를 보여줬다는 점이에요. 권력의 형식을 손에 쥐고도 그걸 어떻게 쓸 줄 모르는 무감각. 그가 로마에서 보낸 몇 달은 하루 네 끼의 연회와, 다음 끼니를 위한 구토와, 9억 세스테르티우스의 탕진으로 채워졌습니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한 게 아니라 — 타키투스의 표현 그대로 — 제국을 "소비"한 이야기예요.

40일 늦게 도착한 승자

비텔리우스가 베드리아쿰 전장에 도착한 건 전투가 끝난 지 40일 뒤였어요. 로마 장군이라면 승리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을 확인했을 텐데, 그는 발렌스(Valens)와 카이키나(Caecina)가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후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승전보가 도착한 뒤에도 느긋하게 이탈리아를 가로질렀습니다. 40일은 그 느긋함의 길이였어요.

땅에는 아직 매장되지 않은 시체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가 로마 병사를 죽인 내전의 시체는 관례상 승자가 묻어야 했지만, 그 관례는 지켜지지 않았어요. 두개골 위로 갈대가 자라 있었죠. 수에토니우스와 디오는 비텔리우스가 그 광경 앞에서 악명 높은 말을 내뱉었다고 전합니다 — 살해된 적의 시체는 가장 좋은 냄새가 나고, 시민의 시체는 더 좋은 냄새가 난다고요(Suet. Vit. 10; Dio 65.1). 로마의 피와 로마의 피를 구분하기를 거부한 말이었어요.

타키투스는 정작 2.70에서 이 문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비텔리우스가 구경꾼처럼 걸으며 표정이 냉담했다고만 기록해요. 구체적 악담보다 무감각한 몸짓이 그의 진단 초점이었죠. 갈바는 통치해서 무능을 드러냈고, 오토는 통치해서 양가성을 드러냈다면, 비텔리우스는 통치해서 도덕적 공감의 완전한 부재를 드러낸 겁니다.

"마치 정복된 도시처럼"

7월 초, 더위의 계절에 비텔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했어요. 약 6만의 병력이 그의 뒤에서 도시로 밀려들었습니다. 군사 행진이 아니라 약탈 군중의 이동에 가까웠죠. 병사들은 무장한 채 사복으로 섞여 가판을 뒤지고 시민을 밀쳤고, 시민들은 두려움에 거리를 피했어요. 타키투스는 이 광경을 한 구절로 봉인합니다.

urbem quasi captam.

마치 정복된 도시처럼. (Hist. 2.88)

패자의 도시가 아니었어요. 승자의 도시가 패배당하고 있었습니다. 카피톨에서 공식 접견이 열렸고 원로원 의원들이 줄지어 경의를 표했지만, 의식은 껍데기였어요. 비텔리우스는 연설을 짧게 끝냈고 실무 논의는 전혀 없었습니다. 접견이 끝난 뒤 그가 서둘러 간 곳은 — 식당이었어요.

하루 네 끼, 그리고 구토

로마에 자리 잡은 비텔리우스의 하루는 네 번의 정식 식사로 구성됐어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일정을 거의 분 단위로 기록합니다(Suet. Vit. 13) — 아침의 간단한 식사, 오전의 점심(prandium), 오후의 또 한 번의 점심, 그리고 저녁의 거대한 만찬(cena). 각각이 한 번의 연회였고 몇 시간씩 지속됐죠. 식사와 식사 사이의 빈틈을 채운 건 구토였어요. 다음 식사를 위해 위를 비워야 했으니까요. 제국의 황제가 먹기 위해 토했고, 토하기 위해 먹었습니다.

가장 악명 높은 요리는 그가 직접 주문한 "미네르바의 방패"였어요. 거대한 은판 위에 생선 간, 공작 뇌, 홍학 혀, 곰치 간, 칠성장어 이리가 쌓였습니다. 제국의 네 방향에서 공수된 재료들이 한 접시에 올라갔고, 요리 한 번에 해군 한 부대가 동원됐어요. 수에토니우스의 계산에 따르면 비텔리우스는 불과 몇 개월 만에 9억 세스테르티우스를 탕진했는데, 이는 네로가 14년간 모은 액수에 맞먹었습니다.

그의 몸도 그에 따라 변했어요. 얼굴은 붉었고 배는 늘어졌으며, 한쪽 다리는 오래전 전차 사고로 절뚝였습니다. 연회장에서 그는 식탁에 기대 졸다가 깨면 다시 먹었어요. 몸이 곧 통치였죠. 몸이 게을렀기에 통치가 게을렀고, 몸이 무감각했기에 결정이 무감각했습니다.

"게으르고 무기력하다"

공공 업무는 세 집단에 흩어졌어요.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군사·재정을 결정했고, 해방노예 아시아티쿠스(Asiaticus)가 관직을 임명했으며, 측근 모임이 연회와 경기 일정을 짰습니다. 원로원은 장식에 가까웠고 비텔리우스 본인은 거의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어요. 타키투스는 이 통치 전체를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pigrum et iners.

게으르고 무기력하다. (Hist. 2.62)

pigrum은 움직임의 부재고, iners는 능력의 부재예요. 하나는 "하지 않음"을, 다른 하나는 "할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수동성의 두 측면이 한 구절에 포개진 거죠. 갈바 부음의 capax imperii nisi imperasset가 수사학적 반어였고 오토 부음의 duobus facinoribus가 양가성의 수식이었다면, 비텔리우스의 pigrum et iners는 수사학 이전의 진단이에요. 그를 그리는 데는 형용사 둘로 족했습니다. 수사학을 유발할 복잡성조차 없는 인물이었거든요.

타키투스는 2.64에서 한 번 더 요약해요 — imperium non habendum sed consumendum, "제국은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라고요(Hist. 2.64). 유지하다(habere)와 소비하다(consumere) 사이의 간격. 황제가 제국을 먹고 있었던 겁니다. 연회에서 공작 뇌를 씹듯, 로마의 재정과 군단의 군기와 원로원의 권위와 시민의 신뢰를 모두 소비 대상으로 씹어 삼키고 있었어요.

단 하나의 능동적 결정

비텔리우스가 로마 입성 직후 내린 단 하나의 능동적 결정 — 그리고 그것이 그의 몰락을 확정했어요. 기존 친위대(Praetorian)를 해산하고 자신의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새 근위대를 구성한 것입니다(Hist. 2.93). 수천 명의 해산된 전직 근위대가 복수심을 품고 로마와 이탈리아에 흩어졌어요. 몇 달 뒤 이들은 플라비우스 측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의 진군에 합류하게 됩니다. 타키투스는 이 결정을 praecipua belli causa, "전쟁의 주된 원인"이라고 평가해요(Hist. 2.93). 유일하게 능동적이었던 결정이 게으른 통치 전체보다 더 큰 재앙을 낳은 셈이죠.

그러는 사이 제국의 다른 끝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어요.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장관 티베리우스 알렉산데르(Tiberius Alexander)가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황제로 선언했고, 이틀 뒤 카이사레아에서 유대 군단이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비텔리우스는 이 소식을 며칠 뒤에야 접수했어요 — 그의 정보망은 연회 일정표만큼도 정교하지 않았거든요. 8월에 모이시아 총독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 진입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도, 비텔리우스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타키투스는 이 정보 단절을 집요하게 묘사해요(Hist. 2.87–2.101).

연회는 계속됐어요. 공작 뇌가 계속 올라왔고, 하인들이 황제를 식탁에서 식탁으로 옮겼습니다. 그가 한 입을 삼킬 때마다 프리무스의 행군은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죠. 타키투스는 2권을 이 대조 위에서 봉인합니다 — 먹는 황제와 진군하는 장군, 로마 한복판의 정적과 알프스 너머의 발소리. 서사는 3권으로 단절 없이 이어지는데, 거기서 크레모나는 불타고 카피톨은 무너지며, 비텔리우스 자신은 로마 시가지를 끌려다니다 "살해된 적의 시체"가 됩니다. 40일 전 자신이 냉담하게 내려다봤던 그 시체의 목록에, 끝내 자기 이름을 올리게 되는 거예요.

세 황제, 세 가지 실패

비텔리우스의 의미는 그 혼자만 보면 잘 드러나지 않아요. 타키투스는 "네 황제의 해"의 세 찬탈자를 의도적으로 나란히 세워, 황제권이 실패하는 세 가지 길을 실험합니다.

갈바는 인색함과 엄격함으로 실패했어요 — 통치할 능력이 있어 보였으나 통치해 보니 무능했죠. 오토는 과도한 희망과 쿠데타의 폭력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엔 의외의 자기 절제를 보였습니다 — 한 인물 안의 양가성. 그리고 비텔리우스는 권력의 형식을 얻고도 사용할 줄 모르는 무감각으로 무너졌어요. 인색함도, 양가성도 아닌, 그저 텅 빈 수동성이었죠.

타키투스가 비텔리우스를 개인 비극의 주체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해요. 그는 비텔리우스를 구조의 효과로 봅니다 — 게르마니아 군단의 관성이 그를 황제로 만들었고, 다시 그를 몰락으로 밀어 넣었죠(Hist. 3.84–85). 한 사람의 무능이 곧 한 시대의 무질서였던 겁니다. 그래서 "먹기 위해 살아간 황제"의 이야기는 단순한 폭식의 일화가 아니라, 권력의 정당성이 무너졌을 때 제국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로마사의 한 단면이에요.

다음 편은 같은 권의 베리투스의 일곱 날, 플라비우스 추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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