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일주일을, 같은 두 사내의 작별을, 같은 유대 해안의 봄 햇살을 두 역사가가 기록했어요. 한 사람은 마흔 단락을 썼고, 다른 한 사람은 다섯 줄을 썼습니다.
마흔 단락을 쓴 사람은 요세푸스예요 — 그는 거기 있었거든요. 다섯 줄을 쓴 사람은 타키투스(Tacitus)인데, 그는 거기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줄, 정확히는 『역사』(Historiae) 4권을 닫는 마지막 한 동사가, 3개월 뒤 예루살렘에 닥칠 운명을 통째로 짊어지고 있어요. 로마식 절제가 어떻게 사료의 부재가 아니라 수사적 선택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한 단어로 줄인 출정
서기 70년 3월,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에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맹인의 눈에 침을 발랐다는 소문이 제국 동방을 가로질러 돌고 있었어요. 그 소문이 아직 가라앉기 전, 같은 황제가 카이사레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에 있는 아들에게 공식 칙서를 보냈습니다. 내용은 짧았어요. 타키투스는 그것을 한 단어로 줄입니다 — accinctus, "무장하고 출발했다"(Hist. 4.86). 그러나 이 한 단어 뒤에는 6만 병력의 재편과 네 군단의 집결과 세 속국왕의 보조군이, 무엇보다 한 청년 장군의 운명이 놓여 있었어요.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서른 살. 몇 달 전까지 그는 아버지의 그림자였습니다 — 베리투스에서 분업이 결정됐을 때 유대 전선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은, 제국의 장남이지만 아직 자기 이름으로 승리를 새기지 못한 군인이었어요. 이제 아버지가 황제가 되었고, 그 아버지가 imperator 칭호와 지방 통수권(proconsulare imperium)을 아들에게 공식 승인했습니다.
카이사레아의 연병장에서 칙서가 낭독됐을 때, 네 군단의 독수리 기장 — 제5 마케도니카(Legio V Macedonica), 제10 프레텐시스(X Fretensis), 제12 풀미나타(XII Fulminata), 제15 아폴리나리스(XV Apollinaris) — 이 차례로 기울어 경례했어요. 시리아에서 온 보조군 3천, 나바타이아 왕이 보낸 낙타 부대, 콤마게네 왕 안티오쿠스 4세의 기병, 에메사 왕 소하이무스의 궁수 — 총 6만의 인간과 말과 낙타가 해안 평원에 운집했습니다.
황폐화를 위하여
타키투스는 이 집결의 세부를 적지 않아요. 그의 4.85는 행정적 공식성만 기록합니다 — 티투스가 유대 작전을 물려받았고, 아버지의 승인 아래 주요 병력을 재편했다는 것. 그리고 4.86의 마지막 한 문장, 이 문장이 『역사』 4권 전체의 종결이에요.
Titus ad vastandam Iudaeam … accinctus.
"티투스가 유대를 황폐화하기 위하여 ... 무장하고 출발했다."
vastandam — 단순한 "정복"이 아니에요. "황폐화"입니다. 로마 라틴어의 이 동사는 도시를 빈터로 만든다는 의미를 담아요. 앞선 편에서 보았던 그 유명한 solitudinem faciunt, pacem appellant("황폐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 Agr. 30)의 어근이 여기에 먼저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자기 장인 아그리콜라를 비판할 때 썼던 그 동사를, 자기 황제의 아들에게도 썼어요. 수사적 양가성이에요 — 칭송의 문장인가, 고발의 문장인가, 독자가 결정하라.
마흔 단락과 다섯 줄
한편 같은 주간을, 요세푸스는 전혀 다른 템포로 기록해요. 그의 『유대 전쟁사』(Bellum Judaicum) 5권은 §1부터 §40까지 단 한 번의 행군을 마흔 단락으로 펼칩니다. 티투스가 카이사레아에서 발을 떼는 장면, 군단이 각기 다른 경로로 예루살렘에 수렴하도록 세 갈래 진군로를 명령하는 장면, 정찰대가 선두를 맡고 보급 수레가 후위를 담당하는 장면, 로마 군영의 저녁 나팔 소리가 유대 구릉에 반향하는 장면.
요세푸스는 거기 있었어요. 통역자로서, 협상 예비 인력으로서, 티투스의 참모 막사 바깥에서 히브리어를 로마 장교들에게 해석해 주며 말이죠. 그는 마흔 단락을 쓸 자격이 있었습니다.
타키투스는 거기 없었어요. 그리고 없었기 때문에 — 혹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다섯 줄로 충분했습니다. 『역사』 4권 서사의 전체 무게를 마지막 한 동사에 실어 보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에요. 키빌리스 반란 40개 장, 무키아누스 섭정 20개 장, 알렉산드리아 기적 5개 장 —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문장의 디딤돌이었습니다. 유대로 가는 행군을 위한 디딤돌이요. 로마 사가의 절제는 때로 사료의 부재가 아니라 수사적 압축의 선택이에요. "더 쓸 수 있었으나 쓰지 않았다"는 침묵입니다.
사라진 열흘
카이사레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 로마 마일, 보병 행군 속도로 열흘이었어요. 그런데 티투스는 도중에 제5·제10 군단을 예리코 방면 우회로로 보내고, 제12·제15 군단을 본대로 삼아 북쪽 사마리아 산악을 넘어 직진시켰습니다. 세 진격로가 예루살렘 북쪽의 스코푸스 산(Mount Scopus) — 감람산 북사면, 도시를 굽어보는 고지 — 에서 합류하도록 설계된 작전이었어요. 4월 첫 주, 유월절을 목전에 둔 유대력 니산월에 그들은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성벽 안의 예루살렘에서는 세 파벌이 여전히 서로의 곡창을 태우고 있었어요.
타키투스의 4.86 문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독자가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역사』 5.1을 만납니다. 그런데 5.1의 첫 문장은 이미 티투스가 예루살렘 성벽 아래에 있어요. 행군 자체는 타키투스의 펜에서 사라집니다 — 마치 그 열흘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대신 그 열흘은 요세푸스의 마흔 단락 속에서만 살아 숨 쉬어요. 두 사가의 협업은 이런 식입니다. 한쪽이 침묵한 공간을 다른 쪽이 채우고, 한쪽이 쓴 결구를 다른 쪽이 이어받아요.
이것이 본 에피소드의 자리예요. 지금 읽고 있는 다섯 줄짜리 장면 — 4.85~86의 티투스 승인·재편·출발 — 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리예요. 바람이 이미 북서쪽에서 불고 있었지만 독자는 그 연기를 아직 맡지 못해요. 그러나 4월의 카이사레아 부두에서 마지막 군단이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이 순간, 타키투스의 vastandam이라는 동사 하나가 허공에 걸려 있습니다. 황폐화를 위하여. 이 한 단어는 3개월 뒤, 같은 봄이 여름이 되기 전에 실현될 거예요 — 예루살렘의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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