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9년, 로마는 한 해에 황제를 넷이나 갈아치우고 있었어요. '네 황제의 해'라 불리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정작 가장 위험한 반란은 로마 한복판이 아니라 제국의 끝자락 라인강 삼각주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야만족 추장이 아니었어요. 라틴어 이름을 쓰고,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로마 보조군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까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가 직접 키운 사람이 로마에 칼을 겨눈 거예요.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4권에서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이 이야기는, 제국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적이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격은 사나우나 풍습은 로마식
이야기의 주인공은 율리우스 키빌리스(Julius Civilis)예요. 타키투스는 그를 단 두 어구로 요약합니다 — ingenio ferox, moribus Romanis, "성격은 사나우나 풍습은 로마식"(Hist. 4.13). 이 짧은 쌍둥이 수식어 안에 그의 전 생애가 포개져 있어요.
그는 카이사르 시대 이래 라인강 하류에 살던 바타비안(Batavian) 족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서기 43년 브리타니아 정복 때는 그의 부족 기병대가 템스강을 건너는 결정적 역할을 맡았어요. 네로 말년에는 반역 혐의로 투옥됐다가 갈바의 사면으로 풀려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라틴어를 모국어처럼 썼고, 이름 앞에는 카이사르 가문이 수여한 율리우스(Julius) 씨족명이 붙어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는 로마에 맞선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타비안 부족 자체가 이 이중 정체성의 배양지였어요.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Germania) 29는 그들을 라인강 하류 삼각주의 "섬"에 사는 부족으로 기록하면서, 로마와의 계약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대신 병사를 낸다. 세대마다 바타비안 젊은이들은 로마 보조군으로 복무했어요. 라틴어를 배우고, 로마식 군사 훈련을 받고, 제대 후엔 시민권을 얻어 돌아왔죠. 그들이 로마에 속한 것은 행정적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여전히 바타비안으로 남아 있던 것 또한 부족 회의가 아직도 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키빌리스는 바로 이 두 사실의 접점에 서 있던 사람이에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흥미로운 건 키빌리스의 첫 수가 공개 선언이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비텔리우스가 아직 로마에서 버티고 있던 서기 69년 8월, 키빌리스는 라인강 하류에서 봉기를 일으키되 그것을 베스파시아누스 측 지원으로 위장했습니다. 플라비우스 진영의 연락병을 받아들였고, 비텔리우스 측 게르마니아 군단의 이동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했으며, 표면상으로는 내전의 한 작은 전선에서 협력하는 동맹처럼 행동했어요.
타키투스는 이 위장의 기간을 건조한 목소리로 기록합니다 — 키빌리스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고요. 표면의 전쟁은 로마 내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위해, 실제의 전쟁은 바타비안 독립을 위해. 로마 장교로 훈련받은 그의 이력은 이 이중 수행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이었어요.
곧 포위가 시작됐습니다. 바타비안 보조군 부대가 로마 군단에서 이탈했고, 카나네파테스와 프리시이가 합류했어요. 크산텐 인근의 거대한 진영 카스트라 베테라(Castra Vetera)에 주둔하던 제5 알라우다이 군단(Legio V Alaudae)과 제15 프리미게니아 군단(Legio XV Primigenia)이 포위됐습니다. 둘 다 오래된 전투 기록을 가진 유서 깊은 군단이었어요. 그런데 서기 69년 말에서 70년 초 사이의 어느 날, 두 군단은 키빌리스에게 항복합니다(Hist. 4.57–60). 처음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다음엔 곧 선언될 "갈리아 제국"에게요. 두 군단의 이름과 번호는 이후 로마 군단 명부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타키투스가 로마 군사사에서 조용히 지워버리고 싶어한 종류의 기억이었어요.
로마를 베낀 제국
서기 70년 1월, 비텔리우스가 로마 광장에서 살해되고 무키아누스가 로마로 향하던 무렵, 키빌리스는 위장을 벗어던졌어요. 그는 이제 바타비안 독립이 아니라 임페리움 갈리아룸(Imperium Galliarum), 곧 갈리아 제국을 선언합니다. 그의 곁에는 트레베리 족장 율리우스 클라시쿠스(Julius Classicus), 트레베리의 공동 지도자 율리우스 투토르(Julius Tutor), 그리고 링고네스 족장 율리우스 사비누스(Julius Sabinus)가 섰어요.
네 사람 모두 율리우스라는 씨족명을 달고 있었습니다. 네 사람 모두 로마 시민이었어요. 네 사람 모두 로마 보조군 장교 경력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로마 시민권을 근거로, 자기들이 복무했던 제국을 모방한 대항 제국을 세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사비누스는 가장 극단적인 걸음을 내디뎠어요. 그는 자신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시기에 남긴 사생아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부족 회의에서 스스로 카이사르(Caesar) 칭호를 채택합니다. 타키투스는 이 계보 주장이 사실인지 따지지 않아요 — 사실이든 수사든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중요한 건 로마의 정통성 논리 자체가 갈리아의 한 섬에서 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타키투스가 『역사』 1.4에서 네 황제의 해의 개막에 선언했던 그 문장 — evulgato imperii arcano, "제국의 비밀이 폭로되었다, 황제는 로마 밖에서도 세워질 수 있다"(Hist. 1.4) — 이 라인강에서 극단적으로 실증되고 있었어요. 황제가 로마 밖에서 세워질 수 있다면, 제국 자체도 로마 밖에서 세워질 수 있는가? 이 연합은 암묵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뒷받침한 것이 두 번째 충격이었어요 — 본나의 제1 게르마니카 군단(Legio I Germanica)과 노바이시움의 제16 갈리카 군단(Legio XVI Gallica)마저 갈리아 제국에 충성 맹세를 한 거예요(Hist. 4.58–59). 베테라의 두 군단에 이어, 이제 네 개의 로마 군단이 부족 연합의 편에 섰습니다. 네 황제의 해는 이미 로마 군단이 돈에 팔린 해였는데, 이제 그것은 로마 군단이 부족에게 팔린 해이기도 했어요.
사막을 만들어 놓고 평화라 부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무키아누스를 통해 자기 사위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Petilius Cerialis)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파견했어요. 케리알리스는 서기 61년 브리타니아의 부디카 반란 때 제9 히스파나 군단이 거의 전멸한 패배의 지휘관이었습니다 — 경력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찍혀 있었죠. 그래도 그는 플라비우스 가문의 사위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가문 신뢰를 택했어요. 서기 70년 봄, 케리알리스는 약 3만 5천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진군합니다.
트레베리 영토에서 케리알리스는 무력 대신 연설을 택했어요(Hist. 4.73). 그는 부족 대표들을 모아놓고 제국 이데올로기의 가장 명료한 진술을 펼칩니다 — 너희가 로마를 몰아낸다면 다음 날 게르만 부족이 침입할 것이다, 로마는 800년간 갈리아의 방패였다, 너희가 내는 세금은 너희의 보호 비용이다, 체제 안에 악한 자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않으나 체제 자체는 공정하다. 타키투스는 이 긴 연설을 거의 중립적으로 재구성해요. 찬양도 비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다른 한 끝에는, 타키투스가 훗날 『아그리콜라』(Agricola) 30에서 브리타니아 족장 칼가쿠스의 입을 빌려 뱉게 할 문장이 있었어요 — solitudinem faciunt, pacem appellant, "그들은 사막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 부른다"(Agr. 30). 케리알리스의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칼가쿠스의 "사막의 평화"는 동일한 라틴어 pax의 두 뒷면이었습니다. 한쪽에서 그것은 상업과 법률과 방어의 이름이었고, 다른 한쪽에서 그것은 정복당한 자의 시선에서 본 침묵의 이름이었어요. 타키투스는 4.73의 연설을 중립적으로 전시함으로써, 독자가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초대합니다.
처형 대신 협상
진압은 체계적으로 진행됐어요. 케리알리스는 라인강 상류의 대회전에서 키빌리스·클라시쿠스와 정면으로 충돌해 승리합니다. "카이사르" 사비누스는 전장에서 사라져 자기 별장 지하 동굴로 숨어들었어요 — 그는 이후 9년간 아내 에포니나(Epponina)의 헌신 속에 숨어 살다가 서기 79년 베스파시아누스 치세 말기에 발각되어 처형됩니다. 다만 그 후일담은 타키투스의 현존 텍스트 바깥의 이야기예요.
바타비안 본토로 후퇴한 키빌리스에게 로마가 제시한 조건은 놀랍게도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서기 70년 9월, 키빌리스는 협상의 대상으로서 항복해요. 로마는 외눈의 바타비안 장교를 단순한 반도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처형하지 않음으로써, 로마는 그의 정치적 무게를 —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방식으로 — 인정한 셈이었어요. 그의 최종 운명은 『역사』 5권 초반 소실부 어딘가에 간략히 적혔겠지만,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로마화는 안정의 보장이 아니다
이 반란의 진짜 무게는 진압 뒤에 있어요. 키빌리스는 한쪽 눈을 가진 로마 기병 장교였습니다. 로마가 훈련시킨 사람이었고, 로마가 시민권을 수여한 사람이었고, 로마가 두 번이나 — 네로 말년엔 감옥으로, 갈바의 사면으론 자유로 — 손댄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자기가 복무했던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행정 구조와 라틴어와 정통성 논리를 전부 빌려와, 그 제국에 맞선 제2의 제국을 몇 달간 실재하게 만든 거예요.
타키투스는 이 역설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키빌리스의 배경과 클라시쿠스의 혈통과 사비누스의 카이사르 자처와 네 군단의 충성 맹세 전환을 하나씩 기록할 뿐이에요. 독자가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 때 나오는 결론은, 타키투스가 『역사』 1.4에서 제기한 "제국의 비밀"의 가장 위험한 형태입니다 — 로마화는 안정의 보장이 아니다. 가장 깊이 로마화된 주변부 엘리트가, 권력 중심이 약해진 시기에, 바로 그 로마적 도구들을 써서 로마 자체에 반기를 들 수 있다.
요세푸스는 같은 시기 같은 주제를 오직 『유대 전쟁사』(Bellum Judaicum) 7.75–88의 짧은 몇 문단으로 처리해요. 그의 관심은 유대에 있었고, 라인 변경의 바타비안 봉기는 그에게 로마의 주변적 소동이었거든요. 같은 사건을 타키투스는 무려 40개 장에 걸쳐 전개합니다. 두 사가의 분량 비대칭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에요 — 타키투스에게 키빌리스는 주변적 소동이 아니라 네 황제의 해의 '숨은 거울'이었습니다. 로마 중심에서 진행되는 내전이 제국 주변부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증폭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실이었어요. 타키투스가 이 단일 서사에 가장 긴 장(章)을 할애한 이유는, 반란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편은 같은 권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황제가 본 환상 — 베스파시아누스의 기적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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