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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진 날 — AD 70년 예루살렘 포위와 로마의 승리

서기 70년 봄, 한 도시가 안에서부터 죽어가고 있었어요. 예루살렘은 세 파벌의 내전으로 쪼개져 매일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이고 있었고, 성벽 바깥에는 다섯 군단의 로마군이 포위선을 좁혀 오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이 끝나기 전, 헤롯이 46년에 걸쳐 증축한 거대한 성전은 잿더미가 되었어요. 유월절이 끝난 직후, AD 70년 4...

2026년 5월 30일 타키투스 『역사』 읽기 조회 1

서기 70년 봄, 한 도시가 안에서부터 죽어가고 있었어요. 예루살렘은 세 파벌의 내전으로 쪼개져 매일 유대인이 유대인을 죽이고 있었고, 성벽 바깥에는 다섯 군단의 로마군이 포위선을 좁혀 오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이 끝나기 전, 헤롯이 46년에 걸쳐 증축한 거대한 성전은 잿더미가 되었어요.

죽어가던 도시로 들어온 군단

유월절이 끝난 직후, AD 70년 4월에 티투스(Titus, AD 39-81)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해 유대 땅에 상륙했어요.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다섯 군단 — V Macedonica, X Fretensis, XII Fulminata, XV Apollinaris에 알렉산드리아·시리아 증원과 동방 속국왕들의 보조군이 더해졌습니다. 이두매의 아랍 궁수들이 진영 바깥을 둘러쌌고, 나바테아 왕이 보낸 낙타 부대가 보급선을 지켰어요.

타키투스는 도시의 상태를 한 줄로 압축합니다 — tres duces, totidem exercitus, "세 지도자, 그만큼의 군대"(Hist. 5.12). 로마 사가의 절제된 문장 한 줄 안에, 한 민족의 자기 분열이 통째로 담겨 있어요. 성벽 안에서 세 파벌이 서로를 죽이는 동안, 성벽 밖에서는 제국이 토둔을 쌓고 있었던 거죠.

유대 피를 가진 두 참모

티투스의 중앙 지휘부에는 역사가 남긴 가장 기묘한 참모 두 사람이 서 있었어요.

첫 번째는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Tiberius Julius Alexander).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Judaeus)의 조카였지만, 유대교를 떠나 로마 관직에 올라 이집트 장관(praefectus Aegypti)까지 지낸 인물이에요. 그가 이제 티투스의 참모장이 되어, 모국 민족의 종교 중심지를 파괴하는 작전의 실무를 맡았습니다. 유대어와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그가 유대 지도부의 전갈을 직접 읽어 해석했어요. 타키투스는 이 역설에 아무 주석도 달지 않습니다. 다만 사실만 적어요 — 참모장은 유대 출신이었다(Hist. 5.1).

세 겹의 성벽, 세 갈래의 파벌

예루살렘은 3중 성벽의 도시였어요. 제3성벽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착공한 외곽 방벽이었고, 제2성벽은 북서쪽 신시가지를 둘렀으며, 제1성벽은 상부 도시와 성전 구역을 이중으로 감쌌습니다. 로마 공병대가 17일간 포위선과 공성탑을 세웠어요.

성벽 안에서는 세 파벌이 구역을 나눠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기스칼라(Iohannes of Gischala)가 성전 안에서, 시몬 바르 기오라(Simeon bar Giora)가 상부 도시에서, 엘레아자르 벤 시몬(Eleazar ben Simon)이 성전 외원에서 각각 지휘했어요. 그런데 포위가 본격화되기 직전, 엘레아자르의 병력은 유월절 순례자로 가장한 요한의 자객들에게 기습당해 흡수되고 맙니다(BJ 5.98-105). 타키투스는 이 세 파벌을 익명으로만 남겨요 — 로마 독자에게는 구체적 인명이 필요하지 않았고, "완고한 유대 파벌"이라는 한 마디면 충분했던 거죠. 구체적 이름은 유대인 요세푸스의 펜에서만 살아남았습니다.

5월 초에 제3성벽이 뚫렸어요. 닷새 뒤 제2성벽이 함락됐고, 성전 북서쪽을 굽어보던 안토니아 요새가 7월 초 무너졌을 때 성전은 무방비로 노출됐습니다.

기근이 왕보다 잔혹하게 다스리다

그사이 도시 안에서는 기근이 어떤 왕보다 잔혹하게 다스렸어요. 요세푸스가 증언하는 장면들은 타키투스의 절제된 문장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BJ 5.424-459; 6.201-213). 부모가 자식의 입에서 빵을 빼앗았고, 시신이 거리에 쌓여 매장할 사람이 없었어요. 마리아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젖먹이 아들을 요리해 먹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 군영에서도 전율이 일었다고 합니다.

성벽을 넘어 도망친 유대인이 금화를 삼켰다는 소문이 돌자, 로마 보조병들이 그들의 배를 갈랐어요. 하룻밤에 2천 명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티투스는 이 행위를 금지했지만 멈추게 할 수는 없었어요. 포위는 도시 바깥의 군단보다 도시 안의 굶주림이 먼저 도시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성전이 타던 날, 그리고 책임의 세 기록

AD 70년 8월 10일, 유대 달력으로 아브월 9-10일에 성전의 마지막 날이 왔어요. 로마 병사가 성소 북쪽 회랑 창문으로 불붙은 횃불을 던졌고, 기름 먹인 나무가 순식간에 타올랐습니다.

여기서 성전 파괴의 책임을 두고 세 사료가 갈라져요.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지휘소에서 달려 나와 "멈추라"고 외쳤다고, "티투스는 성소 자체는 보존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합니다(BJ 6.254-266). 반면 카시우스 디오는 정반대로, 티투스가 직접 파괴 명령을 내렸다고 적어요(Dio 66.7). 수에토니우스는 요세푸스의 변호를 완곡하게 지지하는 쪽입니다(Suet. Tit. 5). 정작 타키투스의 본문은 5.13 경에서 끊겨, 그가 어느 쪽으로 썼는지는 알 수 없어요. 요세푸스 자신은 책임을 흐리는 종교적 문장을 택합니다 — τὸ δαιμόνιον, "신성한 힘이 이 일을 일으켰다"(BJ 6.249-250). 성전 파괴를 신의 뜻으로 보는 이 해석은 어디까지나 사료 측, 곧 요세푸스 자신의 견해라는 점을 짚어 둘게요.

성소가 타는 동안 한 젊은 제사장이 지성소의 휘장을 붙잡고 불 속으로 들어가 죽었어요. 로마 병사들은 금 메노라(menorah, 칠지 촛대), 빵 진설상, 향단, 율법 두루마리를 끌어냈습니다. 티투스가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 유대 전통으로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공간 —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언약궤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휘장 너머엔 빈 공간뿐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그 비어 있음을 놀라워했고, 그것이 "유대인은 무신론자"라는 로마의 오랜 오해를 다시 굳혔어요.

상부 도시는 한 달을 더 버텼습니다. 9월 초, 시몬 바르 기오라가 최후의 지하 터널에서 끌려 나왔고, 요한 기스칼라는 지하 수로에 숨었다가 항복했어요.

AD 71년 6월 로마의 개선식에서, 티투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가 함께 행진했습니다. 전리품 행렬 속에서 황금 메노라가 들려 나왔고, 행렬의 마지막에 시몬 바르 기오라가 사슬에 묶여 끌려가 포룸 끝에서 처형됐어요. 티투스는 그해 바로 개선문(arcus Titi)을 명령했고, 오늘날까지 로마 포룸에 서 있는 그 대리석 부조 위엔 메노라를 들고 가는 로마 병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110만 명 사망과 9만 7천 명 포로라는 통계(BJ 6.420)는 타키투스의 펜이 아니라 요세푸스의 증언으로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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