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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적도 못 한 일을 로마인이 했어요 — 카피톨 신전이 불타던 밤

로마가 세워진 지 500년 가까이 지나 쓰인 책에서, 한 역사가가 도시의 전 역사를 돌아본 끝에 단 하나의 사건을 지목해 "가장 악한 행위"라 부릅니다.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3.72에 박아 넣은 facinus novissimum — "가장 악한 행위"가 그거예요. 갈리아인의 약탈도, 에트루...

2026년 5월 30일 타키투스 『역사』 읽기 조회 1

로마가 세워진 지 500년 가까이 지나 쓰인 책에서, 한 역사가가 도시의 전 역사를 돌아본 끝에 단 하나의 사건을 지목해 "가장 악한 행위"라 부릅니다.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3.72에 박아 넣은 facinus novissimum — "가장 악한 행위"가 그거예요. 갈리아인의 약탈도, 에트루리아 군대의 점령도, 5년 전 네로의 대화재도 모두 기록한 역사가가, 그 모든 걸 한쪽으로 치워두고 서기 69년 12월 19일 밤 카피톨 언덕의 단 한 번의 화재를 그렇게 못 박았습니다.

왜였을까요. 외부의 적이 한 번도 훼손하지 못했던 그 자리를, 로마인이 로마인의 불로 태웠기 때문이에요. 타키투스는 그 방화를 furore principum, "황제들의 광기"가 저질렀다고 씁니다. 그가 고른 속격은 복수형이에요 — 한 사람이 아니라 황제 자리를 다투던 모두가 공동으로 불을 지른 셈이죠. 네 황제의 해가 물리적으로 종결되던, 그 밤의 이야기예요.

연설을 끝내지 못한 황제

크레모나(Cremona) 함락 소식이 로마에 도달한 건 10월 말이었어요.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의 플라비우스 선봉이 비텔리우스 군을 부수고, 이어진 나흘의 약탈로 220년 된 식민지 하나가 una urbe bello civili consumpta, "한 도시가 내전으로 소진되었다"(Hist. 3.34)는 한 문장 속으로 사라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비텔리우스(Vitellius)는 그 소식을 받은 뒤에도 한 달을 더 버텼어요. 타키투스가 이미 pigrum et iners, "둔하고 무능한"(Hist. 2.62) 성정이라 평한 그 인물은, 위기 앞에서 결단이 아니라 관성으로만 반응했습니다. 11월 말, 그는 마침내 원로원에서 황제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려 해요. 오토가 4월 베드리아쿰 패전 뒤 했던 것과 같은,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평화를 위한 자기 희생 연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토의 연설은 다음 날 자살로 완결됐지만, 비텔리우스의 연설은 완결되지 못했어요. 궁 밖에 대기하던 게르마니아 출신 병사들이 연설 소식을 듣고 궁으로 밀고 들어와 황제를 강제로 황궁으로 돌려보냈거든요(Hist. 3.55). 제국의 실질적 주인이 누구인지를 그 장면이 말해줬습니다 — 황제 본인이 아니라 병사들이었어요.

카피톨을 점거한 노인

협상이 좌초되자 플라비우스 측에서 한 노인이 움직여요.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Titus Flavius Sabinus), 일흔 살 전후의 베스파시아누스 친형이었습니다. 네로 치세부터 십여 년 가까이 로마 도시 prefect(장관)를 맡아온 인물로, 알렉산드리아의 아우(베스파시아누스), 유대의 조카(티투스), 로마에 잠복 중인 열여덟 살 차남 도미티아누스 — 부재 중인 플라비우스 가족을 대신해 로마 안에서 가문의 얼굴을 대표해 온 사람이었어요.

12월 18일, 플라비우스 본대가 로마 외곽 수십 km 지점까지 다가왔다는 소식을 받은 사비누스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이 결집할 수 있는 로마 시내 지지자들을 이끌고 카피톨 언덕을 점거하기로 해요. 노인의 판단은 셋이었습니다 — 언덕은 자연 요새였고, 지지자가 적었으므로 방어 가능한 지형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 카피톨의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Jupiter Optimus Maximus) 신전을 점거한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의 신들이 플라비우스를 지지한다"는 상징이었거든요.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2~3일만 버티면 된다고 그는 계산했어요. 함께 올라간 일행 중에는 열여덟 살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와 역사가 클루비우스 루푸스(Cluvius Rufus) — 후일 타키투스가 참고하게 될 사료 제공자 — 그리고 소수의 원로원 의원과 무장 시민 몇백 명이 있었습니다.

500년의 신전이 한밤에 주저앉다

저녁이 되자 비텔리우스 측 잔존 근위대가 언덕을 포위했어요. 양측은 밤새 산발적으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깨졌습니다. 새벽이 오자 비텔리우스 측이 공격을 개시했어요. 지형이 사비누스 편이어서 초기 공격은 격퇴됐습니다. 그러나 정면 돌파가 막히자 병사들은 방법을 바꿔요 — 그들은 언덕 주변 건물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카피톨의 오래된 구조물들은 목조 천장과 수 세기 된 나무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었고, 그 위에 공화정 창건 이래 500년간 쌓여온 예술품과 봉헌물과 전리품이 얹혀 있었어요. 한번 붙은 불은 곧바로 신전 단지 전체로 번졌습니다.

그 신전이 어떤 곳이었는지 짚어 둘게요. 기원전 509년 —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가 쫓겨나고 공화정이 선포된 그해 — 에 봉헌된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은, 집정관들이 취임 첫날 맹세를 바치던 자리였고, 개선 장군이 승리의 월계관을 내려놓던 자리였으며, 로마 시민이 자기 정체성의 중심으로 올려다보던 건축물이었어요. 카피톨(Capitol)이라는 말 자체가 "머리"(caput) — 도시의 머리, 세계의 머리 — 를 뜻했습니다. 술라 내전의 혼란 속에 기원전 83년 한 번 소실됐다가 재건되어 150년을 버텨온 건물이었죠.

그 신전이 내전 중인 로마군의 방화로 한밤에 주저앉습니다. 방어자 대부분이 화재 속에서 죽거나 연기 속에서 포로가 됐고, 사비누스는 부상당한 채 체포돼요. 이 잿더미에서 타키투스는 3.72의 판결을 끌어냅니다.

hoc facinus in urbis nostrae damno novissimum est, et postquam condita est, omnium quae umquam accidere facinerum.

이 행위는 우리 도시가 입은 손실 가운데 가장 새로운 것이며, 도시가 창건된 이래 일어난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악한 것이다. (Hist. 3.72)

타키투스가 이 판결에 무게를 싣는 방식이 정교해요. 그는 세 개의 역사적 참조점을 차례로 놓습니다 — 기원전 390년 브렌누스의 갈리아인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에도 카피톨은 지켜졌고, 기원전 508년경 포르센나가 도시를 포위했을 때에도 지켜졌다고요. nullo externo hoste, "외부의 적이 없는 상태에서", 신들이 여전히 로마를 저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자신의 손으로, 우리 자신의 불로 그 자리가 무너졌다는 거예요. 외부의 야만에 굴복하지 않았던 자리가 내부의 furor(광기)에 파괴됐다는 대조 — 그것이 3.72의 수사학적 척추입니다.

사제로 변장한 청년, 개집에 숨은 황제

그 밤 한 사람만은 빠져나왔어요. 열여덟 살의 도미티아누스는 카피톨 경내 이시스(Isis) 신전 관리자 옷을 걸치고, 언덕이 완전히 포위되기 전의 좁은 틈을 타 밤중에 빠져나갑니다. 이집트 여신의 사제 차림을 한 청년을 비텔리우스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는 시내를 가로질러 야니쿨룸 언덕의 클루비우스 루푸스 집에 숨었고, 거기서 플라비우스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하룻밤을 더 기다립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장면이 사료마다 다르게 기록된다는 점이에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탈출을 짧지만 강렬하게 그립니다(Suet. Dom. 1) — 훗날 서기 81~96년의 폭군이 되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전기 작가가 인정한 거의 유일한 청년기 영웅 장면이거든요. 반면 타키투스는 같은 장면을 3.74에서 짧게 지나쳐요. 서기 96년에 살해된 황제를 회고하며 그 탈출을 영웅화하기를 그는 꺼렸습니다. 같은 사건이 장르와 정치적 거리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는 현장인 셈이죠.

사비누스의 죽음은 다음 날 포룸(Forum)에서 이뤄졌어요. 타키투스는 그를 prope septuagenarium, "칠십에 가까운 노인"(Hist. 3.75)이라 지목합니다. 부상당한 채 끌려 내려온 일흔 살의 prefect는 길에서 침과 돌을 맞았고, 포룸에서 여러 번 찔려 살해됐어요. 시체는 게모니아(Gemonian) 계단 — 범죄자의 시체가 전시되던 공화정 이래의 처형장 — 에 내던져졌다가 티베리스 강으로 버려졌습니다. 플라비우스 가문에서 이 내전 기간 동안 직접 희생된 유일한 구성원이었어요. 그리고 이 희생이 다음 해 비텔리우스 지지자 숙청의 감정적 정당화가 되리라는 사실을, 그때 광장에서는 아무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경구를 얻지 못한 죽음

하루가 더 지났어요. 12월 20일 아침, 프리무스의 플라비우스 선봉이 로마로 진입합니다. 근위대 병영과 황궁 구역에서 시가전이 벌어지는데, 타키투스는 3.83에서 이 전투를 구경하는 로마 시민들을 한 문장으로 고발해요 — spectatores belli, 시민들이 전쟁을 구경거리 보듯 바라보며 이편 또는 저편을 응원하고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고요(Hist. 3.83). 공화정의 "로마 시민"(cives Romanus)이 제국의 관객(spectator)으로 환원된 순간을, 타키투스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비텔리우스는 황궁 어느 구석에 숨었어요. 수에토니우스는 구체적 장소를 전합니다 — 문지기 방 앞의 개집이요(Suet. Vit. 16). 황제는 침대와 매트리스로 입구를 막으려 했다고요.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 장소를 명시하지 않아요. 그의 문장은 pudendo latebrae, "수치스러운 은신처에서"(Hist. 3.84)라는 형용사 한 조각으로만 처리합니다. 개집이라는 단어를 생략함으로써 수치의 강도를 독자에게 맡기는, 수사학적 생략이에요.

발견된 황제는 저항하지 않았어요. 그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며 빌었지만 병사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묶인 손으로 포룸 방향으로 끌려가는 길에 옷이 찢겨 거의 나체가 됐고, 병사들은 칼끝으로 그의 턱을 찔러 군중이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들게 했어요. 공화정의 개선 행렬 — 승리한 장군이 포룸을 지나 카피톨로 오르던 공식 행렬 — 의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카피톨에 오르지 못하는 황제가 포룸으로 끌려 내려온 거죠. 카피톨은 어쨌든 더 이상 그가 오를 수 없는 장소였어요. 전날 밤 그 언덕은 재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종결은 게모니아 계단 근처에서 이뤄졌어요. 타키투스 3.85는 이 장면을 극화하지 않습니다 — minima quaeque vulnera, deinde multa. ita occisus est., "처음에는 작은 상처들로, 그 다음 많은 상처들로. 그렇게 그가 죽었다"(Hist. 3.85). 세 토막의 결론이에요. 그리고 타키투스가 비텔리우스에게 남긴 마지막 평가에는 경구가 없습니다. 갈바의 부음에는 capax imperii nisi imperasset, "다스리지만 않았다면 다스릴 자격이 있었다"(Hist. 1.49)는 수사학적 정점이 있었고, 오토의 부음에는 두 행위의 양극을 묶은 경구가 있었어요(Hist. 2.50). 그러나 비텔리우스에게는 갈바의 대조법도, 오토의 균형법도 없습니다. 경구를 낳을 복잡성이 없었던 인물에 대한 수사학의 생략 — 그것이 타키투스의 가장 냉정한 판결이었어요. 네 황제의 해가 그렇게 닫혔습니다.

한 밤의 불이 다시 쓴 500년

닫히고 나서 남은 것을 타키투스는 차례로 적어 둬요 — 카피톨 언덕의 재, 사비누스의 빈자리, 알렉산드리아의 베스파시아누스, 유대의 티투스, 클루비우스 집에서 걸어 나오는 열여덟 살의 도미티아누스, 그리고 아직 도시 외곽에 있는 무키아누스. 원로원은 긴급 회의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공식 황제로 인정합니다 — 서기 69년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선포된 추대를, 여섯 달 늦게 로마가 공식화한 셈이에요. 『역사』 3권은 이 권력 공백의 장면에서 마칩니다.

그리고 facinus novissimum은 그 공백 위로 계속 떠 있어요. 외부의 적이 한 번도 훼손하지 못했던 자리를 로마인 자신이 로마인의 불로 태웠다는 그 한 줄이, 플라비우스 왕조가 이후 27년 동안 짊어지고 갈 원죄로 남았거든요. 베스파시아누스는 곧 카피톨 재건에 착수하고, 그 재건을 자기 정통성의 상징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500년의 기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타키투스의 판결은 그 재건된 대리석 위에도 그림자를 드리울 거예요.

이 카피톨 화재의 무게는 8개월 뒤 또 하나의 신전 파괴와 나란히 놓을 때 더 선명해져요. 서기 70년 8월,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하며 헤롯 성전이 불탑니다 — 카피톨 화재와 정확히 8개월 차이의 두 성전 파괴죠. 그런데 타키투스는 로마의 성역(카피톨)에는 "가장 악한 행위"라는 극단적 고발을 퍼붓는 반면, 유대의 성역(예루살렘 성전)에는 정당한 군사 행동의 함의를 두거나 침묵합니다. 같은 역사가가 같은 시기의 두 신전 파괴를 정반대로 다루는 거예요. 이것이 로마 사료가 가진 한계 — 로마 중심 관점 — 의 가장 선명한 표현이고, 그래서 타키투스를 읽을 때 그의 판결을 무비판적으로 받기보다 그 시선의 위치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밤의 불이 한 도시의 500년을 다시 쓴다는 것 — 그것이 3.72의 일곱 단어 뒤에 있는 질량이에요. 크레모나가 한 도시의 종결이었다면, 카피톨은 한 도시의 심장이 자기 손에 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네 황제의 해는 황제 자리의 가격이 도시의 벽돌과 신전의 재로 청구된 한 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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