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0년 봄,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60세 황제가 맹인의 눈에 자기 침을 발랐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황제는 농민 출신이었고, 기적을 의심하는 성격이었고, 처음엔 거부했습니다. 그런데도 시력이 돌아왔다는 증언이 남았어요.
더 흥미로운 건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누구냐는 거예요. 신앙심 깊은 사제도, 황제에게 아첨하려는 신하도 아닌, 로마에서 가장 회의적이고 냉정한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였습니다. 그는 이 기적을 믿지도, 부인하지도 않은 채 『역사』(Historiae) 4.81에 적어 넣었어요.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진짜 물음은 "기적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타키투스가 어떤 자세로 이것을 기록했는가"입니다.
8개월의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Serapeum)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어요. 이집트 신앙과 그리스 조각술이 결합된 신전이었고, 그 안뜰에 한 맹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선 사람은 이집트 총독도 사제도 아니라, 새로 옹립된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였어요. 황제는 로마에 발을 들이기 전에 먼저 이집트의 신에게 발을 들인 셈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알렉산드리아 체류는 8개월째였어요. 그는 서기 69년 말 이 도시에 도착했고, 공식적으로는 이집트 곡물을 통제해 비텔리우스의 로마를 압박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제국 식량의 3분의 1이 이집트에서 왔거든요. 황제가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를 쥐고 있는 한, 로마의 빵 가격은 황제의 손에 있었어요. 그런데 서기 69년 12월 비텔리우스가 살해되고 그 시신이 티베르강에 던져진 뒤, 이 도시에서 해야 할 정치적인 일은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종교적인 일이었어요.
세라피스(Serapis)는 이상한 신이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기원전 3세기 초에 의도적으로 창시한 혼합 신 — 이집트의 오시리스·아피스와 그리스의 제우스·하데스 요소를 합쳐 그리스인과 이집트인 모두가 경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신이었어요. 베스파시아누스는 바로 이 신의 신전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침과 발, 그리고 의사들
먼저 일어난 것은 치유였어요. 첫 번째 탄원자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는 세라피스 신이 꿈에 나타나 황제에게 청하라고 명했다고 주장했어요 — "황제께서 당신의 침(saliva)을 제 눈꺼풀과 눈동자에 바르시면, 제가 볼 것입니다." 두 번째 탄원자는 손이 마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꿈도 같은 말을 했어요 — "황제께서 당신의 발로 제 손을 밟으시면, 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처음엔 거부했어요. 농민 출신의 이 황제는 신비주의를 불편해하는 사람이었거든요 —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농담을 좋아하고 기적을 의심하는 성향으로 기록합니다(Suet. Vesp. 7). 그러나 측근들이 권했고, 무엇보다 의사들이 불려왔어요. 의사들의 진단은 미묘했습니다. 맹인의 시력과 마비된 손은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한 상태일 수 있다 — 신경 손상이 영구적이지 않다면요. 따라서 만일 황제의 행위로 치유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로 해석될 수 있고, 만일 일어나지 않는다면 책임은 환자의 상태에 있지 황제의 권위에 있지 않았어요.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게 없는 셈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수락했어요. 침이 맹인의 눈에 닿았고 — 시력이 돌아왔습니다. 발이 마비된 손을 밟았고 — 손이 움직였어요.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타키투스는 4.81 한가운데에 그들에 대해 한 줄을 새겨요.
utrumque qui interfuere nunc quoque memorant, postquam nullum mendacio pretium.
"두 사건에 모두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 거짓말에 대한 보상이 사라진 지금에도."
거짓말에 대한 보상이 사라진 지금
이 한 줄은 깊어요. "nullum mendacio pretium"(거짓말에 대한 보상이 없는)은 플라비우스 왕조가 끝난 뒤(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를 가리킵니다. 타키투스가 이 『역사』를 집필하던 서기 100~110년경, 플라비우스 가문은 이미 사라졌고 — 황제의 기적을 증언해서 얻을 정치적 이득은 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목격자들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타키투스는 이 사실을 기록해요. 그러나 믿지도,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두 개의 단어를 동시에 사용해요 — 한 문장 위에서는 이 사건을 ostentui("전시·시연")라 부르고, 다음 문장 아래에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지속된다(memorant)고 인정합니다. 역사가의 펜은 양쪽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두 가능성을 같은 공간에 놓아둬요.
같은 펜, 다른 자(尺)
베스파시아누스가 본 환상에서 넘어간 곳이 세라피스의 기원이에요. 타키투스의 4.83~84는 사건 서술을 멈추고 이집트 종교의 고고학을 펼칩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꿈, 시노페에서 운반해 온 신상, 그리스 사제 티모테우스와 이집트 사제 마네토의 공동 해석 작업 — 민족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네 장의 여담이에요. 타키투스는 여러 전승을 나란히 놓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저렇게 말한다"며 어느 쪽도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방 신의 기원을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여유가 문장마다 묻어나요.
그런데 바로 이 여유가 같은 저자가 유대 신에 대해 쓸 때는 사라집니다. 그게 이 네 장의 가장 조용한 아이러니예요. 타키투스는 약 30년 뒤 사건을 다루는 『연대기』 15.44에서 네로 치하의 기독교 박해를 서술하며, 이 종교를 exitiabilis superstitio("해로운 미신")로 분류해요. 그는 박해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네로를 비난하지만, 기독교인들 자체에 대해서는 odium humani generis("인류에 대한 증오")의 혐의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같은 타키투스가 — 세라페움의 침과 발 앞에서는 목격자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 적고, 로마 교회의 순교자들 앞에서는 이미 판결을 내린 뒤 서술해요. 이집트 이방 신의 기원은 네 장의 학문적 여담으로 탐구하고, 유대·기독교 종교의 기원은 "재앙적 미신"이라는 세 단어로 일축합니다. 이 이중 잣대가 세라피스 에피소드의 조용한 그림자예요. 베스파시아누스의 기적을 읽은 독자는, 『연대기』 15.44를 읽을 때 이 구절을 기억하게 됩니다. 같은 펜, 다른 자(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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