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9년 봄, 로마에는 황제가 둘 있었어요. 한 명은 게르마니아 군단이 세운 비텔리우스(Vitellius), 다른 한 명은 갈바(Galba)의 머리를 광장 포석 위에 굴리고 권좌를 빼앗은 오토(Otho)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16일 새벽, 둘 중 한 명이 — 아직 패배가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았어요.
흥미로운 건, 그가 죽기로 한 그 밤에도 저항할 수단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는 점이에요. 북쪽에서는 군단 셋이 합류하러 내려오는 중이었고, 잔존 근위대는 여전히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내전을 몇 달 더 끌 수 있었죠. 그런데 오토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어요. 살해자로 권좌에 올랐던 한 남자가, 통치 95일 만에 가장 의외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마무리한 이야기 — 타키투스(Tacitus)가 『역사』(Historiae) 2권에 담은, 판결을 끝내 유보한 한 인물의 초상입니다.
베드리아쿰, 반나절의 패배
무대는 크레모나 인근 베드리아쿰(Bedriacum)의 평원이었어요. 서기 69년 4월 14일, 양군은 포(Po) 강 유역의 트인 지형에서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오토 측 약 3만, 비텔리우스 측 약 4만.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이탈리아 본토의 보급선은 오토의 편이었어요.
그래서 베테랑 중의 베테랑 — 네로 치세에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부디카(Boudicca) 반란을 진압했던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Suetonius Paulinus) — 가 마지막 장군 회의에서 지연 전략을 주장했습니다. 비텔리우스 군단은 알프스를 넘어 장거리 행군 중이라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니,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거였죠(Hist. 2.32). 군사적으로는 정확한 판단이었어요.
하지만 오토의 친형이자 전장 지휘를 맡은 살비우스 티티아누스(Salvius Titianus)와 근위대장 프로쿨루스(Proculus)는 정치 논리로 반박했습니다. 지연은 우리 편 배반자들에게 시간을 준다, 지금 친다 — 즉각 공격이 채택됐어요. 결과는 반나절이었습니다. 낮에 게르마니아 군단의 중앙 돌파가 오토 측 전열을 찢었고, 저녁에는 포위된 근위대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졌어요. 생존자들은 베드리아쿰으로 후퇴했고, 비텔리우스 측 발렌스(Fabius Valens)와 카이키나(Caecina Alienus)는 시체가 널린 전장을 그대로 둔 채 크레모나로 들어갔습니다.
저항할 수 있었던 밤
패배 소식이 브릭셀룸(Brixellum)에 도달한 건 전투 당일 저녁이었어요.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포 강변의 작은 마을, 오토가 직접 택한 본진이었습니다. 정작 황제 본인은 전장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었죠.
부관들의 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북쪽에서 판노니아 3개 군단이 합류하러 남하 중이고, 잔존 근위대 일부는 여전히 무장하고 있으며, 원로원 일부는 오토의 이름으로 포고를 발표할 준비가 돼 있다고요. 저항은 가능했습니다. 내전은 지속될 수 있었어요. 수천 명이 더 죽더라도 "오토"라는 이름은 몇 달을 더 버틸 수 있었죠.
보고를 듣는 동안 오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타키투스는 적어요. 그날 밤 그가 내린 결정은 — 저항의 정반대였습니다.
"충분히 오래 살았다"
오토는 측근들을 모아 짧게 말했어요. 자신은 더 이상 로마 시민의 피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비텔리우스와 자신을 저울에 올려 로마가 무엇을 얻을지 묻는 건 이미 의미가 없다고요. 남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정작 자기는 죽임당하지 못한다(alium posse occidere, non potest ipse occidi) — 그에게는 통치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그리고 타키투스가 2.47에 새겨 넣은 한 문장이 이어져요.
satis diu vel naturae vivi vel gloriae.
자연에게도 영광에게도 충분히 오래 살았다. (Hist. 2.47)
naturae는 생명의 생물학적 한계를, gloriae는 정치적 성취의 한계를 가리켜요. 서른일곱 살의 남자가 자연과 영광 두 차원에서 동시에 "충분하다"를 선언한 겁니다. 몇 달 전 쿠데타로 권좌에 오르던 그 오토가 아니었어요. 타키투스가 앞 권에서 "살해자·쿠데타 주역"으로 그렸던 인물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스토아적 자기 절제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통치가 인간을 드러낸다는 타키투스의 근본 원칙이 여기서 가장 가파르게 실증돼요.
연설 뒤 오토는 실무 처분에 들어갔어요. 여덟 살 조카 코케이아누스(Cocceianus)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비텔리우스의 자비에 기대 살아남으라고 편지를 썼고, 형 티티아누스에게는 항복을 권했습니다. 내가 자살함으로써 형이 승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도록이었죠. 갈바가 양자(養子) 연설에서 국가 차원의 이상을 설파했던 것과(Hist. 1.15–16) 이 장면은 의식적으로 대조돼요. 오토에게는 국가적 수사학이 없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돌본 건 가족 한 명, 형 한 명, 부관 몇 명의 이름이었어요.
두 통의 편지와 한 번의 칼질
방으로 물러나기 전 오토는 주변을 정돈했어요. 관료 문서를 태우고, 네로에게서 물려받은 문서 몇 장 — 밀고자들의 이름이 적힌 것들 — 을 마지막으로 살펴본 뒤 불에 던졌습니다. 공개하면 비텔리우스 치세에 보복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죠. 적의 손에 넘어갈 행정 비밀을 그는 자기 죽음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어요. 편지 두 통을 마무리하고, 칼을 베개 밑에 놓고, 평소처럼 물 한 잔을 마신 뒤 누웠습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날 밤 그는 평소보다 깊이 잤다고 해요(Suet. Otho 11).
새벽, 그는 일어나 칼을 집어 가슴 아래에 한 번에 꽂았어요. 타키투스는 이 순간을 단 세 문장으로 처리합니다. 갈바의 살해를 피와 발소리와 외침으로 길게 묘사했던(Hist. 1.41–44) 그 타키투스가, 오토의 자살 앞에서는 침묵에 가깝게 절제해요. 살해는 극화하고 자살은 담담히 기록함으로써 두 황제의 최후를 수사학적으로 차별화한 거죠. 하인들이 달려왔을 때 오토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시신은 그의 지시대로 단출하게 화장됐고, 묘비에는 이름과 생몰 연대만 새겨졌어요. 몇몇 병사는 그 장례 불길 앞에서 자기 목을 찔러 뒤를 따랐는데, 타키투스는 이들의 죽음이 화장단 위 어떤 명예보다 큰 경의였다고 기록합니다(Hist. 2.49).
판결 없는 부음
오토의 통치는 95일로 끝났어요. 남은 건 편지 두 통, 칼질 한 번, 그리고 타키투스가 2.50에 새겨 넣은 한 문장의 부음이었습니다. 타키투스는 판결을 내리지 않아요. 그는 두 행위를 저울에 올릴 뿐입니다.
duobus facinoribus, altero flagitiosissimo, altero egregio, tantundem apud posteros meruit bonae famae quantum malae.
두 행위로 — 하나는 가장 수치스럽고, 하나는 가장 탁월한 것 — 그는 후대에 좋은 명성과 나쁜 명성을 같은 양 얻었다. (Hist. 2.50)
라틴어 facinus는 중립적 "행위"가 아니에요. 경계를 넘은 행위, 범죄이거나 영웅적이거나 한 극단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타키투스는 갈바 살해와 오토의 자살을 같은 도덕적 범주 — 극단 — 에 넣어요. 그리고 최상급 둘을 세웁니다. altero flagitiosissimo(가장 수치스러운 것)와 altero egregio(가장 탁월한 것). 한 인물 안에 두 최상급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타키투스는 부정하지 않아요. 마지막 구절 tantundem… bonae famae quantum malae("좋은 명성과 나쁜 명성을 같은 양")는 정확한 균형이에요.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습니다. 판결은 유보되고, 양가성 그 자체가 이 인물의 초상이 돼요.
앞 권에서 갈바의 부음(Hist. 1.49)이 capax imperii nisi imperasset("통치만 하지 않았더라면 제위에 합당했을")로 통치를 통해 드러난 무능을 진단했다면, 오토의 부음은 통치를 통해 드러난 양가성을 진단합니다. 통치 전의 오토는 살해자였고, 통치 후의 오토는 자기 희생자였어요. 동일 인물, 정반대의 서사 기능. 두 최상급을 한 몸에 담을 수 있는 자리 — 그것이 타키투스가 오토에게 부여한 위치였습니다.
브릭셀룸의 화장 연기가 가라앉기도 전에,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이탈리아로 느긋하게 이동하고 있었어요. 북이탈리아의 전장은 매장되지 않은 채였고, 로마 원로원은 새 주인의 입성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동방의 유대에서는 여전히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라는 사령관이 한 반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령관이 일곱 달 뒤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포되리라고, 그해 봄의 로마에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자기변명 없는 마지막 편지, 판결 없는 부음, 화장단 앞에서 목을 찌른 병사들 — 이 셋 모두, 타키투스가 "네 황제의 해"라는 참극 속에서 한 인물에게 겨우 허락한 의외의 존엄이었습니다.
다음 편은 같은 권의 먹기 위해 살아간 황제, 비텔리우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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