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9년 가을, 한 도시가 나흘 만에 지도에서 지워졌어요. 크레모나(Cremona) —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던 바로 그해, 기원전 218년에 로마가 갈리아 키살피나 최북단에 세운 식민지였습니다. 286년 동안 두 차례 포에니 전쟁도, 킴브리족·튜튼족의 침공도, 카이사르의 내전도 모두 살아서 통과한 도시였어요. 그런데 그 도시를 끝낸 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로마인 자신이었습니다.
타키투스(Tacitus)는 『역사』(Historiae) 3.34에서 이 참사를 단 네 단어로 봉인해요 — una urbe bello civili consumpta, "한 도시가 내전으로 소진되었다." 286년의 석재와 목재와 사람과 이름이 그 네 단어에 모두 담겼습니다. 황제 자리의 가격이 한 도시의 벽돌이었던, 네 황제의 해의 가장 잔혹한 청구서에 관한 이야기예요.
속도가 곧 승리였던 진군
이야기는 발칸 반도 남쪽 모이시아(Moesia)에서 시작돼요. 서기 69년 8월 말,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황제로 추대한 동방의 군사회의는 두 진군안 사이에서 갈렸습니다. 무키아누스(Mucianus)는 시리아 군단을 이끌고 느긋하게 남하하며 정치적 지분을 챙기려 했어요. 반면 예순세 살의 안토니우스 프리무스(Antonius Primus) — 네로 치세에 공금 횡령으로 추방됐다가 갈바가 복권시킨 인물 — 는 정반대 계산을 내놓습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어요. "임페리움의 전환은 속도의 문제다. 한 달이 지나면 비텔리우스 군단이 집결할 것이고, 그때는 전쟁이 길어진다. 겨울에 알프스를 넘는 것은 자살 행위다." 회의는 그의 논리를 채택했고, 프리무스는 무키아누스의 공식 승인 없이 군단 3만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합니다. 타키투스가 이 대목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는 단어가 있어요 — celeritas, 속도(Hist. 3.4, 3.15, 3.18). 군사적으로는 천재적인 결단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모험가의 독단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프리무스는 4권에서 결국 무키아누스에게 밀려 제거돼요.
부하에게 체포된 배반자
알프스를 넘은 플라비우스 측 선봉은 비텔리우스(Vitellius) 측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어요. 라인 군단 출신 정예 4만이 크레모나 인근에 모였지만, 지휘부는 이미 금이 가 있었습니다. 파비우스 발렌스(Fabius Valens)는 병으로 지휘하지 못했고, 공동 사령관 아울루스 카이키나(Aulus Caecina)는 자신의 두 번째 배반을 설계하던 중이었거든요.
갈바에게서 비텔리우스로 도망친 지 아홉 달, 이제 카이키나는 비텔리우스에게서 베스파시아누스로 옮겨가려 했어요. 타키투스는 그 동기를 셋으로 추정합니다(Hist. 3.13) — 발렌스에 대한 경쟁심, 몰락의 예감, 플라비우스 측이 약속한 집정관 자리. 카이키나는 부대 장교들 앞에서 이적을 선언했어요. 그런데 병사들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그들은 카이키나를 따르지 않았어요. 라인 군단병들은 황제 개인이 아니라 군단의 관성에 복무하고 있었고, 지휘관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군기에 묶여 있었거든요. 병사들은 지휘관을 체포해 군막에 가둬버립니다. 카이키나는 자기 천막에 갇힌 채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신세가 됐어요. 권력의 가격을 양쪽에서 받아내려던 자가 가장 먼저 무력해진 셈입니다.
아버지를 벤 아들
10월 24일 저녁, 베드리아쿰(Bedriacum) 평원에서 전투가 시작됐어요. 4월의 첫 베드리아쿰과 같은 지역이었지만, 이번엔 낮이 아니라 밤이었습니다. 달이 플라비우스 측을 비추고 비텔리우스 측은 그림자 속에 있었어요. 한쪽의 갑주는 은빛으로 빛났고, 다른 쪽의 형체는 지면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Hist. 3.22).
밤의 전장은 끔찍한 혼란이었어요. 병사들은 횃불로 서로를 찾았는데, 횃불은 찾는 자를 동시에 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부대들이 서로를 적으로 오인해 베었고, 같은 군단 안에서도 방패 문장을 확인하지 못해 동료의 투구를 쪼갰어요. 그 밤에 타키투스는 가장 긴 문장 하나를 한 개인 병사에게 바칩니다 — 한 플라비우스 병사가 적병을 쓰러뜨리고 나서야 그 얼굴이 자기 아버지인 것을 알았다고요. 타키투스는 그가 울었는지조차 기록하지 않아요. 그저 내전의 궁극적 정의 —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상태 — 를 그 한 장면에 박아 둡니다.
이 대목에서 타키투스는 드물게 자기 출처를 밝혀요. Vipstanus Messalla memoriae tradit, "비프스타누스 메살라가 기록에 전하기를"(Hist. 3.25). 메살라는 프리무스 측 장교로서 그날 밤 전장에 있었고, 후일 원로원 의원이 되어 회고를 남긴 인물이에요. 타키투스가 『역사』 86개 장에 걸쳐 이름을 들어 출처를 인용하는 경우는 손에 꼽힙니다. 그만큼 이 야간 전투를 그가 일급 증언으로 다뤘다는 뜻이죠. 새벽 직전, 지친 비텔리우스 측 병사들이 동쪽 지평선의 해를 보고 "시리아에서 온 증원이 도착했다"고 오인했고, 그 순간 방어선이 무너졌어요. 실제로 그건 그냥 해였습니다. 그러나 한 번 와해된 전선은 다시 묶이지 않아요. 10월 25일 새벽, 비텔리우스 군은 크레모나의 성벽을 향해 패주하기 시작합니다.
양피지처럼 얇았던 약속
저녁이 되기 전 플라비우스 군이 성벽 앞에 도달했어요. 항복 협상이 열렸고, 프리무스는 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장교들은 그 약속을 받아 적어 뒀어요. 그러나 밤이 오자, 약속은 그것을 적은 양피지만큼이나 얇았습니다. 타키투스 3.32의 숫자가 성문을 타고 흘러들어요.
quadraginta milia armatorum inrupere, calonum lixarumque amplior numerus et in luxum servitiaque corruptior.
4만 무장병이 쏟아져 들어왔고, 종복과 상인의 수는 그보다 많았으며, 사치와 노예 거래로 더 타락한 무리였다. (Hist. 3.32)
4만은 프리무스 군단의 거의 전체였어요. 로마 군단병 한 명당 한두 명의 종복이 따라다녔으니, 실제로 크레모나에 쏟아져 들어온 사람은 8만에서 10만에 이르렀습니다. 타키투스가 calones(군 종복)와 lixae(진영 상인)를 "사치와 노예 거래로 더 타락한" 무리라 부를 때, 그는 병사보다 이 후방 집단이 더 위험했음을 적고 있어요. 병사는 명령을 받지만 종복과 상인은 받지 않거든요. 그들은 약탈의 몫을 노리고 따라붙은 자들이었고, 크레모나는 그들의 회계가 결산되는 도시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나흘이 이어졌어요. 첫째 날 밤, 병사들은 집집마다 쳐들어가 금전과 귀중품을 거뒀습니다. 저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살해됐고, 저항하지 않는 자도 자주 살해됐어요. 둘째·셋째 날엔 약탈이 구역별로 조직됐습니다. 부대마다 거리를 나눠 맡아 체계적으로 재산을 몰수했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집단적으로 자행됐으며, 노예로 팔릴 자들은 줄에 묶여 진영 밖으로 송출됐어요. 넷째 날, 약탈이 끝난 자리에는 불이 들어왔습니다. 텅 빈 집과 신전과 공공건물이 불타 없어졌어요. 타키투스는 한 줄의 예외를 기록해요(Hist. 3.33) — 북이탈리아의 종교 중심지였던 메피티스(Mefitis) 신전만이 성벽 밖에 있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요. 도시가 통째로 소진되고 성벽 밖 신전 하나만 남은 구도는, 오히려 파괴의 완전성을 강조합니다.
프리무스는 병사들의 탐욕을 막으려 했지만, 그의 권위는 이 순간 무력했어요(Hist. 3.32). 뛰어난 전장 지휘관이 윤리의 통제자는 아니었던 거죠. 게다가 플라비우스 측에는 비텔리우스 측이 지불해 온 도나티붐(병사 하사금)을 감당할 금고가 없었습니다. 약탈은 보상의 대체 수단이었어요. 병사들에게 지불하지 못한 돈을, 크레모나의 벽돌이 대신 지불한 셈입니다.
한 도시의 종결
나흘째 밤, 타키투스는 크레모나의 창건 연도를 불러내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집정관이던 해,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던 그해. 286년 전의 두 집정관 이름을 그가 굳이 기록한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가 한니발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운 최전방이었어요. 그 도시를 로마가 로마의 손으로 불태운 거죠.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내전이 소진했습니다.
그리고 타키투스의 최종 판결이 내려와요 — una urbe bello civili consumpta, "한 도시가 내전 하나로 소진되었다"(Hist. 3.34). 여기서 consumere라는 동사는 경제학의 언어예요. 다 써버린다, 소비한다, 연료처럼 태운다는 뜻입니다. 타키투스는 크레모나를 플라비우스 내전이 태운 연료로 기록한 거예요. 황제 자리의 가격이 한 도시의 벽돌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감추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이 왜 세계사적으로 무거울까요. 타키투스는 『역사』 1권 첫머리에서 네 황제의 해를 imperii arcanum, "제국의 비밀이 드러난"(Hist. 1.4) 순간으로 규정했어요 — 황제가 로마가 아닌 곳에서도 옹립될 수 있다는 비밀이요. 크레모나 약탈은 그 비밀이 어떤 물리적 형태로 실현되는지를 잔인할 만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황제 자리를 놓고 로마인이 로마인을 학살하고, 로마 도시를 파괴한 참상 — 그것이 타키투스 반(反)내전 철학의 핵심이에요. 정치적 필연성이 있더라도, 내전의 인간적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같은 주의 로마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크레모나 함락 소식이 도착했을 때, 황궁의 비텔리우스는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타키투스가 이미 pigrum et iners, "둔하고 무능하다"(Hist. 2.62)고 해부한 그 인물은, 이제 자기 정권의 종말을 발음하는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의 명령이 아니라 그의 관성이 아직 한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크레모나의 재를 덮은 북풍이 로마를 향해 불고 있었어요. 내전의 물리적 결론은 이미 북이탈리아에서 내려진 셈이었고, 남은 것은 로마 시내의 정치적 결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카피톨 언덕 위에서 또 한 번의 불로 서명될 예정이었어요.
다음 편은 같은 권의 카피톨이 불타던 밤으로 이어집니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