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70년 8월, 예루살렘이 불탔습니다. 이 사건은 한 사료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현장에 있던 요세푸스, 로마 측 전승을 남긴 타키투스 계열 기록, 그리고 수에토니우스의 티투스 전기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같은 시대를 비춥니다.
이 글은 포위전, 사료의 엇갈림, 전후 로마 정치의 기념 방식을 중심으로 AD 70년을 정리합니다.
강철 띠로 묶인 도시
AD 70년 4월, 네 개 로마 군단(약 7만 명)이 예루살렘을 에워쌌어요. 30세의 사령관 티투스(Titus) — 1년 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 는 도시 전체를 두르는 약 7km 목책을 단 3일 만에 세웠습니다(Jos. BJ 5.491-501). 그 순간부터 예루살렘은 절대적 기아 상태에 빠졌어요. 유월절 순례자까지 갇혀 수십만이 성안에 있었습니다.
도시를 무너뜨린 건 로마보다 내부 분열이 더 빨랐어요. 세 파벌(시몬 바르 기오라·엘르아살·기샬라의 요한)이 서로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며 학살했습니다. 요세푸스는 굶주림에 자기 젖먹이를 먹은 한 여인(Mary of Bethezuba)의 참상까지 기록하는데(Jos. BJ 6.201-213), 차마 옮기기 어려운 장면이에요. 한편 티투스의 본영에는 요세푸스 자신이 아람어 중재자로 동행하며 성벽 아래에서 항복을 권했지만(Jos. BJ 5.375-419), 수비대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해 활을 쏘았습니다. 중재의 실패가 성전 파괴를 강제한 구조적 조건이 됐어요.
8월 9일 밤의 회의
7월 17일, 성전의 영구 희생 제사(tamid)가 제물 부족으로 중단됐어요(Jos. BJ 6.94). 그리고 8월 9일 밤, 티투스는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Jos. BJ 6.236-243). 안건은 하나 — 성전 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완전 파괴, 성벽만 파괴, 저항 여부에 따라 결정, 세 입장이 맞섰어요.
흥미로운 건 명령자가 누구였는지가 1,950년째 미해결이라는 점입니다. 요세푸스는 티투스 본인이 건물 보존을 지지했다고 적어요(BJ 6.241) — 그러나 그는 친(親)플라비우스 사가였죠. 반면 4세기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타키투스 소실부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정반대로 티투스가 직접 파괴를 명했다고 기록합니다(Chronica 2.30.7). 현대 학계는 둘 다 편향으로 보되 술피키우스가 타키투스 원본에 더 가깝다고 평가해요(Schürer 1973). 본 글은 어느 쪽도 단정하지 않고 두 증언을 나란히 둡니다.
아브월 9일, 성전이 불타다
AD 70년 8월 10일 — 히브리력 아브월 9일(Tisha B'Av) — 새벽, 한 이름 없는 로마 병사가 동료의 어깨에 올라 성전 측창으로 불타는 막대기를 던져 넣었어요. 요세푸스는 그 행위를 "어떤 악마적 충동"(daimonic)에 의한 것으로 묘사합니다(Jos. BJ 6.251-252). 불은 목재 부속에 옮겨붙어 몇 시간 만에 건물 전체를 삼켰어요. 요세푸스는 티투스가 달려와 소화를 명했으나 병사들이 듣지 않았다고, 술피키우스는 티투스가 방화를 명했다고 — 또 엇갈리지만, 결과는 하나였습니다. 헤롯이 BC 19년부터 재건한 제2성전이 그날 전소했어요.
티투스는 가장 안쪽 지성소(대제사장만 1년에 하루 들어가던 곳)에 들어갔고, 금 메노라·진설병 탁자·은 나팔을 가져갔습니다. 그 세 물건은 11년 뒤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부조에 영구히 새겨져요.
두 성전, 같은 날 — 그 후
같은 사건이 유대교에는 전혀 다른 의미였어요. 아브월 9일은 이미 BC 586년 제1성전(솔로몬 성전) 파괴의 기일이었는데, 같은 날짜에 제2성전까지 무너진 거예요. "두 성전이 같은 날에" 멸망했다는 상징적 일치로, 아브월 9일은 오늘까지 유대력에서 가장 슬픈 단식일로 지켜집니다.
다음 편은 같은 권의 티투스의 잃어버린 하루로 이어집니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