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79년 여름, 로마 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는 죽어가면서도 서류에 서명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두 문장을 남겼습니다. 하나는 엄숙했고, 하나는 냉소적이었어요.
"황제는 서서 죽어야 한다." 그리고 — "이런, 나는 신이 되는 듯하다" (vae, puto deus fio).
수에토니우스는 이 장면을 베스파시아누스전 23~24장에 짧게 기록했어요 (Suet. Vesp. 23-24). 두 문장 안에 플라비우스 평민 황제의 10년 재위 전체가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귀향
AD 79년 초여름, 69세의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중부 사비네(Sabine) 지방으로 향했어요. 목적지는 두 곳이었습니다. 하나는 팔라크리나이(Falacrinae) — 그가 태어난 농촌 마을. 다른 하나는 레아테(Reate, 현 리에티) 북동쪽의 아쿠아이 쿠틸리아이(Aquae Cutiliae) — 어린 시절 할머니 테르툴라(Tertulla)와 여름을 보내곤 했던 유황 온천이었어요 (Suet. Vesp. 24).
제국의 8대 황제, 플라비우스 왕조 창시자, 예루살렘 원정을 지휘한 인물이 — 평민 가계의 조부모가 살던 시골로 돌아가고 있었어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귀향을 "캄파니아 향발"이라 짧게 적었지만, 실제로는 더 내륙의 사비네 지방이었습니다. 이미 여름 초입부터 건강 이상을 느끼고 있었어요 — 현대 의학은 말라리아 감염(삼일열, Plasmodium vivax)으로 평가합니다. 사비네 지방에 풍토병이었던 바로 그 열병이었어요.
병중에도 중단 없는 집무
베스파시아누스의 대응은 그의 생애 내내 일관된 방식이었어요. 병을 들어 일을 멈추는 것이 없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렇게 기록했어요 (Suet. Vesp. 24.1): "nec umquam morbo minus muneribus principatus destitit" — "병중에도 원수의 의무를 중단하지 않았다."
사절들을 접견하고, 문서에 서명하고, 매일 아침 집무실 소파에 앉았습니다. 여정 중에도 이 습관을 유지했어요. 아쿠아이 쿠틸리아이 온천에 도착한 뒤 유황천의 찬물을 과도하게 마신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Suet. Vesp. 24.1 ; Dio 66.17). 말라리아의 장기 효과에 탈수와 여정 피로가 겹쳐 장 질환이 급격히 심해졌어요. 설사와 복통이 밤을 채웠습니다.
그 밤에도 그의 행정은 중단되지 않았어요. 시종들이 그를 자리에 앉혀 두었고, 서류가 계속 들어왔으며, 사령관들이 수시로 보고를 받아갔습니다. 일을 하면서 죽어가는 황제였어요.
"황제는 서서 죽어야 한다"
AD 79년 6월 23일 새벽, 결정적 실신이 왔어요.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주치의가 측근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가 깨어났어요. 의식이 남은 상태에서 그가 일어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Suet. Vesp. 24.2). 측근들이 말렸지만, 그는 특유의 고집으로 몸을 일으켰어요. 팔을 붙들어 일어선 채, 측근 두 명의 어깨에 기대어 서서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imperatorem stantem mori oportere.
"황제는 서서 죽어야 한다."
로마 장군의 전통 — 전장에서 쓰러진 지휘관도 몸을 일으켜 병사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는 관례 — 를 플라비우스 평민 출신 황제가 침상에서 환기시킨 것이에요. 원수정 행정의 수직적 구조를 몸의 자세로 번역한 장면이었습니다.
vae, puto deus fio
그리고 몇 분의 침묵 뒤, 두 번째 문장이 나왔어요. 훨씬 조용하고, 훨씬 냉소적인 — 수에토니우스 베스파시아누스전 23.4가 그대로 기록한 문장이에요:
vae, puto deus fio.
"이런, 나는 신이 되는 듯하다."
두 단어의 감탄사 vae(이런, 어이쿠)가 전체 문장의 어조를 결정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사망하면 원로원이 공식 투표로 divus(신격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아우구스투스 이래의 관례였어요. 베스파시아누스는 자기에게도 곧 그 절차가 적용될 것을 예견하고, 그 예견을 농담조로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사후 누메리우스 아티쿠스(Numerius Atticus)가 "승천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리비아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받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거예요. 클라우디우스 신격화 뒤 세네카가 호박화의 신격화(Apocolocyntosis)로 그 의례 전체를 풍자한 것도 알고 있었겠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임종에서 같은 의례의 시작을 예상하며 — "나는 신이 되는 듯하다"고 빈정댄 것은, 원수정 의례 시스템 전체에 대한 60년 평민 출신 황제의 최종 판단이었습니다. 가짜 신성(divinitas)의 행정적 구성에 대한 냉소와 수용의 동시성이었어요.
일곱 개의 비정상적 죽음 뒤에
AD 79년 9월 17일, 원로원이 투표로 divus Vespasianus 칭호를 의결했어요. 로마 포룸에 신전 건축이 시작되었고, 그의 승천 장면이 AD 81년 티투스 개선문 천장 패널에 새겨졌습니다. 황제가 삼족 독수리를 탄 채 하늘로 오르는 모습 — 임종에서 "나는 신이 되는 듯하다"고 농담으로 말한 그 장면이 2년 뒤 아들 티투스의 개선문 천장에 영구화된 것이에요.
역사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의 자연사는 보기 드문 사건이었어요. 티베리우스의 베개, 칼리굴라의 단검, 클라우디우스의 독버섯, 네로의 강제 찌름, 갈바의 단검, 오토의 자살, 비텔리우스의 갈고리 — 그 7개의 비정상적 죽음 뒤에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 늙어 죽은 황제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비네 평민의 냉소적 유머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체제의 신화적 극장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 플라비우스 왕조의 정치적 의미였고, 그 대체의 첫 행동이 vae, puto deus fio 다섯 단어였어요.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사망한 지 몇 주 뒤, 나폴리 만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8월 24일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해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세 도시를 묻어 버렸어요. 그 소식이 티투스 신임 황제의 책상 위에 도달한 것은 즉위 두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전 편 요타파타 동굴의 예언자에서 시작된 베스파시아누스 이야기가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다음 권은 book-11 티투스의 돌 위에 돌 하나도로 이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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