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40년 여름, 칼리굴라의 명령 한 통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했습니다. 내용은 단순했어요. 성전 안에 황제 동상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상은 결국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명령이 내려지고, 총독이 지연하고, 편지가 지중해 위에서 엇갈리는 6개월 동안 로마 황제 숭배와 속주 공동체의 긴장이 선명하게 드러났어요. 이 글은 그 사건을 로마 행정과 지역 정치의 충돌로 읽습니다.
황제가 신이 되려 했던 시대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황제 신격화는 원칙적으로 사후에만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칼리굴라는 달랐습니다. AD 37년 10월 중병에서 회복한 뒤 성격이 급변했고, AD 40년경에는 생전 신격화를 요구하며 제국 전역 신전에 자기 동상을 설치하는 통합 숭배 체계를 추진했어요(Suet. Caligula 22.3).
동방 속주에서는 300년 된 왕실 숭배 관습 덕분에 이 명령이 큰 마찰 없이 수용됐습니다. 문제는 단 한 곳이었어요 — 예루살렘 성전. 이 성전에는 어떤 형상도 들어갈 수 없었고, 이 원칙을 유대인 공동체는 목숨으로 지켜 왔습니다.
황제 직서가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에게 도달한 건 AD 40년 초여름이었어요. 명령은 명확했습니다 — 2개 군단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황제 동상을 설치하라. 이행 실패는 반역(Jos. AJ 18.261-263).
페트로니우스의 선택 — 지연이라는 전술
페트로니우스는 명령을 수신한 그날 저녁, 몇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합니다(Jos. AJ 18.264). 그는 유대 신앙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을 품은 인물이었고, 동시에 명령 불복종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했어요. 무거운 현실 앞에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 지연이었습니다.
우선 Ptolemais(현 아코)로 이동해 군단을 집결시켰어요.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즉시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대 지도자들을 협상 명분으로 초청했어요. 유대인 측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사제·장로·일반 유대인 수천 명이 Ptolemais 평원에 몰려와 40일 동안 단식 농성을 벌였어요. 늙은 사제들이 총독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 "우리 목을 먼저 치시오. 동상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보지 않겠소"(Jos. AJ 18.269-272). 유대 여성들과 아이들이 길에 누워 군단의 행군을 막았어요.
페트로니우스는 다시 Tiberias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또 수십 일을 지연했습니다. 황제에게는 동상 제작과 운송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로마와 시리아 사이 편지 왕복에 6-8주가 걸린다는 점을 그는 체계적으로 활용했습니다(Jos. AJ 18.273-276). 행정 지연을 무기로 삼은 셈이었어요.
로마에서 온 편지, Agrippa의 설득
같은 무렵 로마에서는 다른 전선이 열렸어요. 헤롯 아그립바 1세 — 칼리굴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유대 북부 왕국을 부여받은 분봉왕 — 가 황제에게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칼리굴라가 연회에 취해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했을 때, 아그립바는 즉시 그 제안을 거절했어요. 대신 다음 날 장문의 편지를 올렸습니다(Philo Leg. 276-329).
편지의 요구는 하나였어요 — 성전 동상 명령 취소. 정치적 이유(유대 봉기 위험), 행정적 이유(지방 불안 증가), 공동체적 이유(조상의 법에 반하는 강제 숭배)를 세 층위로 구성한 세밀한 논증이었습니다. 칼리굴라가 편지를 읽고 겉으로 명령을 취소했어요(Philo Leg. 333-335).
그런데 취소에는 조건절이 붙었습니다. "페트로니우스가 아직 동상을 제작하지 않았다면 취소하되, 이미 제작했다면 계속 설치하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칼리굴라는 로마에서 새 동상을 제작해 예루살렘으로 운송하라는 새 명령을 내렸습니다(Jos. AJ 18.305). 실질적인 명령 재활성화였어요.
지중해 위에서 엇갈린 두 통의 편지
페트로니우스는 새 명령에도 유대인 봉기 위험이 임박하다는 편지로 재검토를 요청했어요. 칼리굴라는 격노했고, 페트로니우스에게 자살 명령을 보냈습니다 — 명령 불이행의 책임을 스스로 처분하라는 것이었어요(Jos. AJ 18.304).
자살 명령이 로마에서 안티오크로 해상 이동하는 데는 평균 27일이 걸렸어요. 겨울철에는 더 오래. 그 편지가 지중해 위에서 이동하는 동안,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AD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가 지하 통로에서 암살됐어요. 이 소식이 안티오크까지 오는 데도 약 27일.
AD 41년 2월 20일경, 페트로니우스는 두 통의 편지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 황제의 자살 명령, 그리고 그 황제의 암살 소식. 요세푸스는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해요 — "27일의 항해 차이가 그의 생명을 구했다"(Jos. AJ 18.308-309). 이미 죽은 황제의 명령은 자동 무효였어요. 페트로니우스는 살았고, 동상은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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