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67년 여름, 갈릴리 산지에서 한 유대인 장군이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로마 사령관 앞에 섰어요. 그 순간 그는 기묘한 예언 한 마디를 내뱉었고 — 그 예언이 2년 뒤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 사가 요세푸스가 자기 손으로 기록한 자기 이야기예요. 그리고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카시우스 디오까지 — 세 로마 사가가 같은 예언을 각자의 방식으로 수록했습니다 (Suet. Vesp. 4.5 ; Tac. Hist. 5.13). 포로가 예언자가 되고, 예언자가 황제의 측근이 되고, 측근이 역사 자체를 기록한 — 기묘한 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요타파타 동굴이었어요.
47일의 포위
AD 67년 6월 초, 갈릴리 중부 산지의 요새 도시 요타파타(Jotapata, 현 요드파트) 성벽 밖에 로마 제5 마케도니카 군단과 제10 프레텐시스 군단이 포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어요. 로마 측 사령관은 57세의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그 아래에는 27세의 아들 티투스(Titus). 유대 측 사령관은 30세의 요세프 벤 마티아스 — 훗날 라틴어로 요세푸스(Josephus)라 불릴 인물이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학자 출신인 요세푸스는 그해 초 혁명 정부가 갈릴리 군사 총독으로 파견한 인물이었어요. 24,000명의 주민이 성 안에 갇혔고, 포위는 47일간 이어졌습니다 (Jos. BJ 3.150-258). 물 배급이 날마다 줄었고, 식량 창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어요.
흥미로운 점은 요세푸스 자신이 이 47일 방어전을 수십 년 뒤 유대전쟁사에서 3인칭으로 서술했다는 사실이에요. 주인공이 곧 역사가인 이 구조가 AD 67년 사건의 가장 독특한 사료적 특이성입니다. "요세푸스는 성벽 위에 서서 공성탑이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그 문장을 쓴 사람이 곧 그 성벽 위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거든요.
동굴과 제비뽑기
AD 67년 7월 20일 새벽, 성벽이 뚫렸어요. 로마 군단이 시내로 진입하면서 요세푸스는 성 안 깊은 동굴로 피했습니다. 함께한 인원은 40명 — 주요 장교와 친지들이었어요. 사흘간 동굴 안에 머물렀는데, 셋째 날 한 여자 포로가 동굴 입구를 로마 측에 밀고했어요 (Jos. BJ 3.341).
군단 한 부대가 내려왔고, 요세푸스의 옛 친구 니카노르(Nicanor)가 대표로 나서 베스파시아누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항복하면 목숨을 보장한다." 동굴 안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어요. 대다수는 투항 거부와 집단 자살을 외쳤습니다. 요세푸스는 반대 입장을 개진했지만 — 자살은 중대한 윤리적 파탄이며, 살아 있어야 다음 국면을 기다릴 수 있다고 — 40명의 다수는 설득되지 않았어요 (Jos. BJ 3.362-382).
결국 집단 자살이 결정되었어요. 방법은 제비뽑기 — 뽑은 순서대로 앞사람이 뒷사람을 죽이는 방식이었습니다. 41명이 순서를 받고 첫 번째부터 차례로 죽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Jos. BJ 3.387-388이 기록하는 다음 두 문장이 후대 가장 의심받는 대목이에요. 요세푸스는 자신이 마지막 두 사람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앞선 39명이 모두 죽고, 자신과 한 사람만 남았을 때 —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이지 않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와 투항했다는 것이에요. 그는 이 결과를 운명의 개입처럼 해석했습니다. 현대 학계(Henry Thackeray, 1929)는 여기서 제비 조작 가능성을 지적해요 — 40명 중 자신과 한 사람이 마지막 둘로 남을 통계적 확률은 1/1560. 하지만 확증은 불가능합니다. 요세푸스의 펜 외에 다른 증언이 없기 때문이에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살아남은 요세푸스와 동료가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와 베스파시아누스의 본영으로 연행되었어요. 57세 사령관과 27세 아들 앞에 포로로 세워진 그 자리에서, 요세푸스는 예언 한 마디를 발설했습니다 (Jos. BJ 3.400-402):
σὺ μέν ἔσει Καῖσαρ, Οὐεσπασιανέ,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καὶ σὺ καὶ ὁ παῖς σου οὗτος.
"당신은 카이사르가 될 것입니다, 베스파시아누스여. 통치자(임페라토르)가 될 것이며 — 당신과 이 당신의 아들도."
당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치세의 평범한 장군이었어요. 황제 혈통과는 무관한 57세 인물이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황제로 상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타파타 동굴에서 생환한 포로 유대 사령관이 그를 임박한 황제로 선언한 것이에요.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시 믿지 않았지만 —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요세푸스를 로마로 송환하지 않고 자기 곁에 포로로 두었어요 (Jos. BJ 4.622-629).
2년 뒤 예언의 실현
2년이 흘렀어요. AD 68년 6월 네로가 자살했고, AD 69년의 "네 황제의 해"(갈바·오토·비텔리우스)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AD 69년 7월 1일, 이집트 총독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임페라토르로 추대했어요. 이어 유대아·시리아 군단이 차례로 가세했고, 2년 만에 요타파타 동굴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시 요세푸스를 자유 해방하고, 로마 시민권과 플라비우스(Flavius) 가문 명예를 부여했어요 (Jos. BJ 4.629). 그 이후 요세프 벤 마티아스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Titus Flavius Josephus)가 되었습니다. 예언의 실현이 예언자 자신의 신분 대전환으로 이어진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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