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9년 1월 15일 오전, 로마의 중심 포룸에서 황제 한 명이 쓰러졌어요. 재위 7개월 7일. 수에토니우스의 갈바전이 이 장면에 단 한 문장을 할당하고, 타키투스는 이날의 3시간을 로마사에서 가장 서늘한 문장들로 재구성했어요.
AD 69년은 훗날 '네 황제의 해'로 불리게 됩니다. 갈바·오토·비텔리우스·베스파시아누스가 한 해 안에 차례로 황제를 주장하거나 교체된 혼란의 시기예요. 그 첫 번째 전환점이 바로 1월 15일 포룸의 사건이었어요. 이 글은 수에토니우스(갈바전 17-20)와 타키투스(역사 1.14-49), 플루타르코스(갈바 23-27)를 교차하며 그날을 따라갑니다.
피소 입양 — 닷새짜리 황태자
AD 69년 1월 10일, 팔라티노 언덕의 한 방에서 73세의 갈바가 한 인물을 황제 후계자로 지명했어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 — 크라수스 삼두 가문의 후손이자 네로 시대 추방자였다가 막 귀환한 35세의 원로원 귀족. 갈바는 피소의 "혈통의 정통성"을 이유로 들었고, 이 양자 입양을 통해 공화정 귀족 전통을 복원하려 했어요 (Suet. Galb. 17).
문제는 다른 후계 후보였던 오토가 이 소식을 궁전 밖에서 듣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루시타니아 총독 10년, 갈바 추대 지지자, 모두가 후계자로 예상했던 인물. 지명에서 배제된 그날 밤부터 오토는 이미 준비된 대안을 작동시켰습니다. 친위대 내 갈바 불만 세력과의 연결, 장교 20여 명에 대한 뇌물 1백만 세스테르티우스 (Tac. Hist. 1.24). 갈바가 "나는 병사를 선발하지 돈으로 사지 않는다"고 선언한 (legi a se militem, non emi, Suet. Galb. 16) 바로 그 도시에서, 오토는 반대 문법으로 권력을 재계약하고 있었어요.
1월 15일 아침의 징조
1월 15일 새벽, 갈바가 팔라티노 앞마당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어요. 점술가 움브리키우스가 제물의 내장을 들여다보다 표정이 굳었습니다 — "곧 배신이 있다, 적이 궁전 문 안에 있다." 그 순간 오토는 이미 빠져나가 베스타 신전 근처에서 가마꾼들과 합류하고 있었어요.
타키투스는 이 5일을 "세 종류의 악덕으로 갈바를 망친 측근들" diversis vitiis(각자의 결함으로)이라고 묘사해요 (Tac. Hist. 1.48). 친위대장 라코는 무능, 재무 담당 이켈루스는 전직 노예 출신의 탐욕, 집정관 비니우스는 사익 추구. 갈바는 이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조언 속에 끝까지 일관된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궁전에 남아라", "친위대에 가서 연설하라", "관망하라" — 세 갈래 사이에서 그는 결국 포룸으로 가는 가마에 올랐습니다.
커티우스 못 자리의 포석
수에토니우스는 이 순간에 단 한 구절만 할당합니다 — "어떤 병사에게, 잔혹한 기회로 살해되었다" (a quodam milite feritatis commoditate, Suet. Galb. 20). 타키투스는 더 생생해요: 가장 가까이 있던 한 늙은 병사가 단검을 휘둘러 목을 쳤는데, 그 살해자의 이름을 타키투스가 끝내 적지 않습니다 — "확실하지 않다" (incertum an...). 살해자의 익명화는 판결이었어요. 시대 전체가 범인이라는.
이어지는 타키투스의 한 문장 — "모두가 그의 죽음을 원했고, 누구도 그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Tac. Hist. 1.49). 구경하는 군중 중 한 명도 가마 쪽으로 달려오지 않았어요. 상점 문짝 뒤, 광장 기둥 뒤, 이발소 창문 너머 — 모두가 쓰러진 노인을 보았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날 한 시간 안에
갈바 이후 한 시간 안에 세 명이 더 죽었어요. 비니우스는 아이밀리아 회당 근처에서 포박되어 참수되었고, 라코는 도주 중 잡혀 처형되었으며, 이켈루스는 공개 처형되었습니다. 양자 피소는 베스타 신전 계단으로 도망가 성소의 권리를 주장하려 했지만, 그를 추격한 기병 한 명이 신전 문 앞에서 베었어요 (Tac. Hist. 1.43). 양자 지명 닷새 뒤의 일이었어요.
갈바·비니우스·라코·피소 네 사람의 머리가 그날 오후 오토 병영 앞에 창끝에 꽂혀 전시되었습니다. 친위대 병사들은 각자 수령한 그날 아침의 약속 금액을 세고 있었어요 — 일인당 4천 세스테르티우스. 갈바가 생전에 끝내 거부한 바로 그 병사 보너스의 일부가, 그가 죽은 뒤에 지급되었습니다.
로마사의 의미 — 제국의 비밀이 드러났다
이 에피소드는 로마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95년이 AD 68년 네로의 자살로 종결된 뒤, 갈바는 최초로 '로마 바깥(히스파니아)에서 군단의 추대로 즉위한 황제'가 되었어요. 타키투스는 이 선례가 열어놓은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 "제국의 비밀이 드러났다. 황제는 로마 바깥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 (evulgato imperii arcano posse principem alibi quam Romae fieri, Tac. Hist. 1.4). 이 원칙이 한번 드러나자 오토(로마 친위대)·비텔리우스(게르마니아 군단)·베스파시아누스(알렉산드리아 선포)가 각지에서 연쇄 추대되는 구조가 열렸어요.
갈바 자신은 그 구조를 막을 수 없었어요. 73세의 절제와 공화정 귀족 전통이 — 7개월의 재위에서 친위대 소외·보너스 거부·측근 의존이라는 세 가지 치명적 실수와 충돌했습니다. 타키투스의 부음 한 문장이 이 충돌을 2천 년째 기록하고 있어요 —
"사인이었던 동안에는 사인 이상으로 커 보였고, 모두의 합의로, 통치하지 않았다면 황제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Tac. Hist. 1.49)
이 문장의 "모두의 합의로"(omnium consensu)는 반어예요. 아무도 합의하지 않은 시대에, 타키투스가 "합의"라는 단어를 골라 갈바 개인의 실패를 시대 전체의 실패로 확장한 것입니다.
한편, 포룸의 피가 포석 위에서 마르기 전에, 1월 2일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군단이 총독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소식은 아직 로마에 도달하지 않은 채였어요. 세 번째 황제가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다음 편은 Brixellum의 새벽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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