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4년 8월, 76세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나 캄파니아로 향했어요. 40년 동안 로마 제국의 틀을 세운 남자가 마지막으로 나선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카프리 섬에서 나흘을 보내며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소년들에게 그리스어 농담을 시키고, 새로운 복식 도안을 그렸어요(Suet. Aug. 98). 그 나흘이 40년 제국 통치의 축소판이었습니다 — 그리스 문화, 라틴 군단, 희극, 건축. 모든 것이 작은 섬의 4일 안에 하나씩 지나갔어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따라가면, 이 임종 이야기는 단순한 황제의 죽음이 아니에요. 연출된 삶의 마지막 장면이고, 하나의 수수께끼가 봉인된 순간입니다.
아버지가 죽은 방으로
카프리에서 나폴리로, 나폴리에서 베네벤툼까지 티베리우스와 동행했어요. 거기서 갈라질 예정이었는데, 놀라 인근에서 복부 통증이 재발했습니다. 일행은 길을 꺾어 놀라의 옛 가문 저택으로 들어갔어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지리를 주석 없이 배치합니다 (Aug. 100.1). 그 방은 73년 전 아우구스투스의 친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BC 58년에 임종한 바로 그 방이었어요. 우연인지 설계인지 알 수 없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우연으로 죽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생애 전체가 상징의 관리였으니, 마지막 방의 선택도 그 관리의 연속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간 뒤, 리비아를 통해 급히 파발이 일리리쿰으로 보내졌습니다 — 티베리우스를 되돌아오게 하라고.
"연극이 끝났으니, 박수를 치라"
AD 14년 8월 19일 아침, 임종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아우구스투스는 측근들에게 거울과 빗을 요청했어요(Suet. Aug. 99.1). 헝클어진 머리칼을 직접 빗게 하고, 아래턱이 처진 얼굴을 다듬게 했습니다. 친구들이 방에 모여 들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에게 그리스어로 한 질문을 던졌어요 — "내가 인생의 희극을 잘 연기했다고 생각하느냐?"
친구들이 그렇다고 답하자, 그는 고전 그리스 희극의 종막 관용구를 낭독했습니다:
ἐπεὶ δὲ πάνυ καλῶς πέπαισται, δότε κρότον, καὶ πάντες ἡμᾶς μετὰ χαρᾶς προπέμψατε.
"잘 연기했으니, 박수를 보내라, / 그리고 우리 모두를 기쁨으로 떠나보내 달라."
수에토니우스는 이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자신의 라틴어 축약본 "acta fabula est, plaudite" (연극이 끝났으니 박수를 치라)를 뒤에 덧붙입니다(Aug. 99.1). 40년 동안 집정관 앞에서 연설하고, 개선식에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 신전 헌납식에서 사제의 찬송을 받은 인물의 마지막 요구가 다시 한 번의 박수였어요 — 황제로서가 아니라 광대로서. 수에토니우스가 이 전환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연기된 권력이었고, 그 연기의 품질이 40년의 평화를 지탱해 왔다는 것이죠.
그는 측근들을 차례로 내보내고, 방에 리비아만 남겨 두었어요. 리비아의 팔에 안긴 채 마지막 문장을 남겼습니다 — "Livia, nostri coniugii memor vive, et vale"(리비아, 우리 결혼을 기억하며 살고, 잘 있으라, Aug. 99.1). 그 자세로, 한 번의 가벼운 호흡과 함께 76세의 생애를 마쳤어요. 수에토니우스는 "그가 평생 원했던 쉬운 죽음을 얻었다"(exitum etiam facilem et qualem semper optaverat sortitus est, Aug. 99.2)고 기록합니다.
봉인된 문과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그런데 문이 즉시 닫혔어요. 리비아는 사망 사실을 티베리우스가 놀라에 도착할 때까지 비밀에 부쳤습니다. 디오는 이 지연을 수일로 기록하고, 타키투스는 "기다림의 정확한 기간은 불명"이라고 신중히 남겨 둡니다(Ann. 1.5). 그 며칠 동안 놀라 저택의 문은 이중으로 경비되었고, 리비아는 바깥에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호전 중이라는 메시지를 계속 내보냈어요.
그 시간 동안 플라나시아 유배지에 있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공식 전해지기 전에 — 갑자기 처형되었습니다. 타키투스(Ann. 1.6)는 그 명령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명백히 밝히지 않아요. 아우구스투스의 최후 명령이었다는 설, 티베리우스 즉위 직전 명령이었다는 설, 리비아 단독 결정이었다는 설 — 2,000년 동안 공백은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결과뿐이에요. 티베리우스가 놀라에 도착했을 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유일한 친손자가 이미 살해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증인과 제국 숭배의 시작
시신은 그날 밤부터 로마로 운구되었어요. 8월 더위 때문에 밤에만 이동했고, 낮에는 지방 도시 관공서에 안치되었습니다.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화장이 거행되었는데, 수에토니우스는 화장 장면의 한 세부를 전합니다. 전직 법무관 누메리우스 아티쿠스가 군중 앞에서 "나는 아우구스투스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고,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는 누메리우스에게 1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급했다는 것이에요(Dio 56.46 병치). 증인의 증언이 공식 매수되는 그 순간, 제국 숭배의 행정 절차가 처음으로 완성된 형태로 작동했습니다. 한 달 뒤인 9월 17일, 원로원이 정식으로 divus Augustus 칭호를 의결했어요.
타키투스는 권의 초입에 아우구스투스 사후 평가의 두 그룹 담론을 병치합니다(Ann. 1.9-10). 긍정 그룹은 40년의 내전 없는 평화를 가져왔다고 했고, 부정 그룹은 모든 실권을 단 한 가문에 집중시켰다고 했어요. 두 평가 모두 참이었고, 두 평가 모두 서로를 부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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