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81년 9월, 로마에서 가장 사랑받던 황제가 가마에 실려 사비나 구릉으로 향했어요. 41세, 재위 2년 2개월. 그는 마지막 순간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딱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다. 단 하나만 빼고."
그 "하나"가 무엇인지를 수에토니우스는 끝내 밝히지 않아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학자들은 세 가지 가설 사이에서 논쟁 중입니다. 한 황제의 미지정 고백이 그의 생애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방식 — 수에토니우스 전기 문학의 가장 치밀한 수사학 중 하나예요.
인류의 사랑과 기쁨
티투스는 수에토니우스 12권 중 유일하게 절대 긍정 평가를 받는 황제예요. 수에토니우스는 전기 첫 문장에서 그를 "인류의 사랑이자 기쁨"(amor ac deliciae generis humani, Suet. Tit. 1.1)으로 부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도미티아누스까지 12명 중 유보 없는 찬사는 티투스뿐이에요.
재위 2년 2개월 동안 그는 세 가지 재난을 연달아 맞았어요. AD 79년 8월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묻혔고, 이듬해 봄 콜로세움(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을 완공해 100일간의 개관 경기를 열었으며, AD 80년 여름 로마 대화재가 캄푸스 마르티우스 북부를 삼켰어요. 티투스는 재난마다 개인 재산을 쏟아부었고, 피해 지역 재건에 직접 법령을 내렸습니다.
"선행 없이 보낸 하루는 잃어버린 하루다"(diem perdidi) — 이 발언이 전해집니다(Suet. Tit. 8.1).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날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베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온 말이었어요. 이 발언이 "diem perdidi"(하루를 잃었다)라는 에피소드 제목의 근원입니다.
아버지의 임종 장소로
AD 81년 아우구스타 축제(ludi in honorem divi Augusti) 마지막 날, 티투스에게 발열이 닥쳤어요. 고열·오한·복통. 궁정 의사들이 사비나 지방 아콰에 쿠틸리아에(Aquae Cutiliae)의 유황천 요양을 권했습니다(Suet. Tit. 10.1).
그 장소가 의미심장해요. 정확히 2년 전 그의 친부 베스파시아누스가 숨을 거둔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같은 지방, 같은 온천, 같은 계절. 아들이 아버지의 임종 장소로 자기 임종을 위해 향하는 여정 — 수에토니우스는 이 구조를 아무 주석 없이 기록해요.
가마에 실려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를 따라 북동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열이 점점 심해졌어요. 그가 한 순간 가마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Suet. Tit. 10.1). 동행자들이 그 장면을 전했고, 그것이 이 에피소드 전체의 시각적 중심이 됩니다.
단 하나의 후회
하늘을 올려다본 뒤, 티투스가 한 문장을 혼잣말처럼 내뱉었어요:
"eripi sibi vitam immerenti; neque enim extare ullum suum factum paenitendum excepto dum taxat uno."
"생명이 부당하게 자신으로부터 빼앗기고 있다. 후회할 행동이 하나도 없으니까 — 단 하나만 제외하고." (Suet. Tit. 10.1)
원문은 두 절로 구성됩니다. 첫째 절 "immerenti"(부당하게,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서) — 그는 자기 죽음을 부당한 것으로 규정했어요. 41세, 한창의 나이, 사랑받는 재위 중이었으니까요. 둘째 절 "excepto ... uno"(하나를 제외하고) — 그런데 그 하나가 무엇인지를 수에토니우스는 명시하지 않아요. 카시우스 디오도 모릅니다(Dio 66.26). 티투스 본인이 설명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학자들이 제시한 세 가설이에요. 첫째, 동생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경고 무시 — 도미티아누스가 즉위 직후 반역 음모를 여러 차례 꾸몄는데 티투스가 처단하지 않고 용서했고, 그 용서가 자신의 죽음을 부른 원인이 됐을 가능성(디오는 티투스를 독살한 것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주장합니다). 둘째, 조카딸 율리아 플라비아와의 간음 의혹 — 동생의 이혼한 전 부인이자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후대 전승(Dio 67.3). 셋째, 베레니케 추방에 대한 가책 — 헤롯 왕가 출신의 유대 공주로 AD 66-79년의 연인이었는데, 로마 여론의 반대로 추방한 것에 대한 미련이었을 가능성.
수에토니우스는 세 가설 모두를 열어 두고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아요. 이 의도적 공백이 이 권의 핵심 수사학 장치입니다.
급작스러운 죽음과 독살 의혹
아콰에 쿠틸리아에에 도착한 직후 티투스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어요. 도착 후 불과 4일 만이었습니다(Suet. Tit. 11.1).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같은 장소에서 수 주에 걸쳐 악화된 것과 달리, 아들은 며칠 만에 숨을 거두었어요.
이 속도의 차이가 독살설을 낳았어요. 디오의 증언이 가장 구체적입니다 — 도미티아누스가 차가운 눈 덩어리를 열이 오른 티투스의 몸에 얹어 체온을 강제로 낮추었다는 것(Dio 66.26). 독이 든 생선 요리를 도미티아누스가 직접 처방했다는 변형 전승도 있어요. 수에토니우스는 이 독살설을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 단지 죽음이 갑작스럽고 빨랐음만을 기록하고 원인 규명은 독자에게 남겨요. 그러나 다음 권(Dom. 2)에서 도미티아누스의 형에 대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디오와 같은 방향의 암시를 제공합니다.
AD 81년 9월 13일, 아콰에 쿠틸리아에에서 티투스가 숨을 거두었어요. 41세, 재위 2년 2개월 20일.
같은 날, 신격화 — 그리고 개선문
수에토니우스가 특별히 기록하는 한 세부가 있어요. 시신이 로마로 운구되던 그날, 군중이 대규모 공개 애도로 도시를 가득 채웠고 원로원은 티투스가 죽은 당일 회의를 소집해 신격화를 의결했습니다(Suet. Tit. 11.1). 아우구스투스 이후 첫 즉일 신격화였어요. 베스파시아누스(사후 3개월)·클라우디우스(사후 수 주)조차 절차적 지연이 있었던 것과 달리, 티투스는 그날 바로 "디부스 티투스"(Divus Titus)가 됐습니다. 로마 민중의 감정이 원로원 행정을 앞지른 최초의 사례였어요.
그로부터 얼마 뒤, 도미티아누스의 명령으로 티투스 개선문이 착공됐어요. 개선문 천장 패널에는 티투스가 독수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신격화(apotheosis) 조각이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개선문을 의뢰한 것이 티투스 본인도 아버지도 아닌 동생 도미티아누스였어요. 디오의 독살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 개선문은 살해자가 피살자의 신격화를 공식화하는 건축물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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