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37년 3월 초, 77세의 티베리우스는 11년 만에 카프리에서 내려왔습니다. AD 26년 로마를 떠나 바위섬 위 별장들을 옮겨 다니며 11년을 보낸 노황제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토로 향한 것이에요.
11년 만의 귀환, 남의 집에서
배는 미세눔 해안에 닿았고, 일행은 전 집정관 루쿨루스의 옛 별장 — 100년 전 폼페이우스 시대의 그 사치로 유명했던 해안 저택 — 에 들어갔어요. 카프리의 자기 소유 별장들과 달리, 이곳은 남의 집이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지리의 의미를 주석 없이 남겨 둡니다(Tib. 73.1). 11년간 자기 땅 밖으로 나가지 않던 인물이 마지막 2주를 다른 사람의 집에서 보낸다는 것이요.
도착 다음 날부터 몸이 배신하기 시작했어요. 아스투라 여행 중 이미 시작된 복통이 심해졌고, 키르케이에서는 투창 경기를 참관하다 창끝을 잡으려다 옆구리를 삐었습니다. 미세눔에서는 식사 중 갑작스런 실신이 일어났어요. 주치의 카리클레스가 손목에 손가락을 댔습니다. 의사의 얼굴이 굳었고, 옆방에서 마크로가 그 표정을 읽었어요.
동행한 친위대장 마크로의 움직임은 몇 주 전부터 이미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충성을 티베리우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돌려놓고 있었어요 — 티베리우스의 증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스물넷의 가이우스, 훗날 칼리굴라라 불릴 인물이었습니다(Tac. Ann. 6.50).
의사의 입맞춤과 인장 반지
타키투스의 기록이 가장 세밀합니다(Ann. 6.50). 카리클레스 의사가 티베리우스의 손을 잡고 맥을 짚으면서, 표면적으로는 이별의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가장했는데 실은 맥박의 희미함을 확인한 것이었어요 (quasi exiturus consilio eam dextram observans sed fallaciter). 그리고 마크로에게 은밀히 보고했습니다 — 숨이 곧 끊어질 것이라고.
마크로는 즉시 계승 절차의 마지막 단계를 작동시켰어요. 칼리굴라가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티베리우스의 황제 인장 반지가 옮겨질 준비가 되었습니다. 원로원 앞에서의 공식 의결과 군단의 서약이 인장의 이동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했어요. 그 순서가 흔들리면 제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마크로는 그 순서를 통제하고 있었어요.
눈을 뜬 노인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깨어났어요. 죽은 것으로 판단되어 칼리굴라에게 인장이 넘어간 직후, 노인이 눈을 떴고 음식을 요청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순간을 단 한 문장으로 전합니다 — "호흡을 되찾고 음식으로 원기를 회복했다" (spiritum recepit ciboque acceso et refotis, Suet. Tib. 73.2).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어요. 인장은 이미 칼리굴라 손에 있었고, 근위대는 이미 새 황제에 충성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가 완전히 회복하면 모든 것이 역전되어야 했어요 — 인장 반환, 충성 서약 취소, 마크로와 칼리굴라 즉시 반역죄. 방 밖으로 나간 마크로의 결정은 1분 안에 내려졌습니다.
수에토니우스(Tib. 73.2)는 "베개로 눌려" (pulvino oppressum)라고 기록하고, 타키투스(Ann. 6.50)는 "많은 옷의 무게와 짐으로 짓누르게 하라" (iniectu multae vestis et onere premeretur)고 기록합니다. 카시우스 디오(Dio 58.28)도 동일한 증언을 남겼어요. 세 사료가 거의 일치합니다.
그런데 필로의 기록(Legatio 141)만 다른 그림을 그려 넣었어요 — 그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가장 평화로운 최후"로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필로는 AD 39-40년 로마 파견 당시, 즉 마크로가 여전히 권력자였던 칼리굴라 재위 중에 이 서술을 남긴 것이라 칼리굴라 측 공식 서사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커요.
세 사료가 일치하는 것은 암살이었을 가능성 자체였고, 어느 사료도 그것을 확증하지는 않아요. 모두 "또한 이렇게 죽었다고 한다" (traditur, fertur) 형식으로 남겨 둡니다. 현대 학계(Barbara Levick, 1976)는 77세 고령과 장기 질환, 마크로의 이해 관계 조합으로 자연사 우선, 가속 개입 가능성 부차로 정리하나 결정적 증거는 없습니다. 확증 불가의 공백이 2,000년을 이어 가고 있어요.
티베리움을 테베레로
AD 37년 3월 16일 오후, 사망이 공식 발표되었어요. 이번에는 번복이 없었습니다. 칼리굴라가 미세눔 집 앞에서 군중에 첫 연설을 했어요 — 슬픔의 표정과 공식 애도사.
시신이 로마로 운구될 때 일이 기묘하게 꼬였어요. 로마 민중은 11년의 은둔이 누적시킨 원한을 풀기 위해 "시신을 테베레 강에 던지라"고 외쳤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 요구를 기록하고(Tib. 75.1), "Tiberium in Tiberim!"(티베리우스를 테베레로!)이라는 구호를 주석 없이 남깁니다. 티베리우스의 이름이 이 강에서 유래했으니, 이름을 원래의 자연으로 돌려보내라는 상징적 처단이었어요.
원로원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아우구스투스 능묘에 매장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신격화는 허가되지 않았어요. 티베리우스는 divus가 되지 못했습니다. 원수정 역사상 처음으로 신격화 없이 매장된 황제가 되었어요. 11년의 은둔과 베개 질식이 만든 결과였습니다.
타키투스의 부음 한 문장이 전체를 집약해요(Ann. 6.51) — "Tiberio corpus, animus, aetas, fortuna alia atque alia"(티베리우스는 몸과 마음, 나이와 운이 서로 다른 시기마다 달라졌다).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여러 개의 인물이 한 생애 안에 연이어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젊은 드루수스·리비아의 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어쩔 수 없는 계승자였던 티베리우스, 로도스의 자발적 유배자 티베리우스, 세야누스의 위임자 티베리우스, 카프리의 은둔자 티베리우스 — 그리고 미세눔의 베개 아래 77세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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