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끝내 손을 데고 말았어요. 그런데 정작 놀라운 건 그다음입니다. 위탁을 배신한 친구를 벌하는 대신, 키루스(Cyrus)는 그를 첩자로 일으켜 세워요. 수치가 위장이 되는 순간이죠.
지난 권에서 키루스는 포로가 된 절세의 미녀 판테아(Panthea)의 보호를, 어릴 적부터의 동무인 메디아 사람 아라스파스(Araspas)에게 맡겼어요. 사랑은 의지의 문제일 뿐이라고, 불 옆에 손을 두어도 데지 않을 수 있다고 호언하던 사내였습니다. 이 권은 그 호언이 산산이 부서지는 이야기로 시작해요. 그리고 한 사내가, 아내가 받은 예우에 보답하려 가장 위험한 자리를 자청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끝내 손을 데고 만 사내
판테아의 천막을 지키던 아라스파스는, 날이 갈수록 그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눈길은 깊어졌어요. 처음에는 임무였고, 다음에는 습관이었고, 마침내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거두지 못했죠(Cyr. 6.1).
어느 날 그는 끝내 선을 넘었어요. 판테아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중한 청이었으나, 거절당하자 그 청은 압박으로 바뀌었고, 위협에 가까운 말까지 흘렸어요. 수사(Susa)의 왕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 아브라다타스(Abradatas)를 향한 정절을 지켰고, 단호히 그를 물리쳤어요. 그러나 두려웠죠. 이 사내가 더 큰 일을 저지를까 봐, 그녀는 키루스에게 사람을 보내 사정을 알렸습니다. 자신을 지키라 맡긴 자가 도리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요.
천막 안의 사람들은 폭풍을 예감했어요. 그토록 신뢰한 친구가 위탁을 배신했으니, 응분의 벌이 내릴 차례였죠. 누군가는 아라스파스를 끌어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다
키루스는 웃었어요. 그것도 너그러운 웃음이었습니다. 그는 부하 한 사람을 아라스파스에게 보내, 다만 여인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고만 전하게 했어요. 그러나 사자가 떠나기 전, 키루스는 곁에 있던 이들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라스파스를 탓할 수만은 없다고요.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곁에 두고서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일찍이 자신이 판테아를 보지 않겠다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느냐고요. 사랑이란 의지로 다스려진다던 아라스파스의 호언은, 인간의 약함을 모르는 자의 말이었을 뿐이라고요(Cyr. 6.1).
지난 권의 그 복선 — "불 옆에 손을 두어도 데지 않는다"던 호언 — 이 정확히 여기서 회수됩니다. 무너지기 직전에 가장 큰 소리를 내던 그 자신감이, 이제 키루스의 통찰을 증명하는 거울이 된 거예요. 절제(sōphrosynē)란 위험을 의지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입구를 아예 막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요.
수치가 위장이 되다
수치는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아라스파스는 자신의 호언이 산산이 부서진 것을 알았고, 키루스를 볼 낯이 없었어요.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누군가 자신을 비웃을까 두려워 사람들의 눈을 피했습니다. 한때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내가, 이제는 그림자처럼 진영의 구석을 맴돌았죠.
키루스는 그 모습을 그냥 두지 않았어요. 그는 아라스파스를 가만히 불러들였습니다.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는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신들조차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조차 사랑 앞에서는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고, 자네의 실패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자책으로 자신을 갉아먹지 말라고 했어요(Cyr. 6.1).
그러고 나서 키루스는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에게는 한 가지 청이 있었어요. 마침 자네에게 꼭 맞는 일이 하나 있다고요. 리디아의 왕 크로이수스(Kroisos)가 거대한 연합을 규합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 규모도 배치도 계획도 안갯속이었습니다. 누군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 그 모든 것을 캐내야 했죠. 그런데 지금 아라스파스만큼 그 일에 어울리는 자가 없었어요. 키루스에게 미움을 사 박해받다 못해 적에게로 도망친 사내 — 적들은 그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것이었으니까요. 아라스파스의 수치가, 도리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위장이 되는 셈이었습니다(Cyr. 6.1).
아라스파스의 눈에 빛이 돌아왔어요. 자신을 무너뜨린 바로 그 실패가, 이제 주군을 위한 가장 값진 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명을 받들었죠. 며칠 뒤 진영에는 아라스파스가 키루스의 노여움을 견디다 못해 적진으로 달아났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사람들은 분개했고, 더러는 안타까워했습니다. 오직 키루스와 몇몇만이 진실을 알았어요. 화근이 될 뻔했던 위탁이, 키루스의 손안에서 첩보의 자산으로 뒤바뀐 것입니다.
황금 낫전차를 자청한 남편
판테아는 키루스의 처분을 전해 들었어요. 자신을 위협한 자를 벌하지 않고 도리어 품어, 다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일으켜 세웠다는 것을요. 그녀는 키루스라는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범하지 않은 절제로 정절을 지켜 주었고, 이제는 자신을 모욕한 자에게마저 관후했어요. 그녀는 이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키루스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어요. 자신에게는 남편이 있다고. 수사의 왕 아브라다타스는 지금 박트리아(Bactria)에 사신으로 가 있으나, 자신이 부르면 반드시 달려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안다면 — 아내가 포로의 몸으로도 정절과 명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누구의 절제 덕분이었는지를 안다면 — 그는 분명 키루스의 편에 설 것이라고요(Cyr. 6.1).
오래지 않아 천 명에 가까운 기병을 거느린 한 무리가 진영으로 다가왔습니다. 선두에 선 이가 아브라다타스였어요. 두 사람은 오랜 헤어짐 끝에 다시 만났고, 판테아는 남편에게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빠짐없이 들려주었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졌으나 손끝 하나 침범당하지 않았던 것, 그것이 키루스의 절제 덕이었다는 것을요. 아브라다타스가 어떻게 이 은혜를 갚으면 좋겠느냐 묻자, 판테아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 받은 그대로, 키루스에게 충성과 명예로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Cyr. 6.1).
이튿날 아브라다타스는 키루스 앞에 서서 동맹이자 벗이자 종으로 받아 달라 청했어요.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위험한 자리를 맡기를 원했어요. 마침 키루스는 새로운 무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 바퀴 축에 시퍼런 낫을 단 전차, 적의 대열을 갈아엎으며 돌진하는 낫전차였죠. 가장 큰 충격을 주는 만큼 모는 자에게도 가장 큰 위험이 따르는 자리였어요. 아브라다타스는 그 부대를 자청해 맡았습니다. 아내가 받은 예우에 자신의 몸으로 보답하려는, 한 사내의 명예였어요(Cyr. 6.1).
무대 위의 인물일수록 — 결전을 앞두고
키루스의 진영은 결전을 향해 빠르게 채비를 갖추어 갔어요. 크로이수스가 규합한 연합은 수에서 키루스를 압도했습니다. 키루스는 그 열세를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술과 편제로 메우려 했죠. 대장장이들의 망치 소리가 밤낮으로 울렸어요. 낫전차의 날이 벼려졌고, 한쪽에서는 거대한 이동 공성탑이 여러 마리 소의 힘으로 끌려 움직였습니다. 정찰병들이 적진을 오가며 적의 규모와 위치를 물어 왔고, 키루스는 그 정보 위에 전투의 진형을 짜 나갔어요(Cyr. 6.1).
그 모든 준비의 한가운데 아브라다타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차를 손수 점검했고, 낫의 날을 매만졌으며, 말들을 길들였어요. 판테아는 남편을 위해 황금 갑옷을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자랑스러워했고, 또한 그를 두려워했어요. 가장 위험한 자리를 자청한 남편을, 사랑과 불안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았죠. 판테아도, 아브라다타스도, 그날 이후의 일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사실과 이야기를 갈라 둘게요. 이 모든 장면 — 욕정에 무너진 아라스파스, 그를 첩보원으로 일으켜 세운 키루스, 남편을 불러들인 판테아, 낫전차를 자청한 아브라다타스 — 은 헤로도토스(Herodotus)에도, 다른 어떤 옛 사료에도 없는, 크세노폰만의 인물들로 빚어진 이야기예요. 같은 시대를 전한 헤로도토스는 크로이수스의 패망을 신탁의 오해로 풀어냈지만(Hdt 1.76–84), 크세노폰은 그것을 사람의 덕과 군대의 준비로 그렸습니다. 낫전차가 후대 페르시아군이 실제 운용한 병기라는 점에서 역사적 핵이 비치긴 하지만, "키루스 개인의 발명"이라는 공로는 크세노폰의 이상화예요.
다만 무대 위에 세운 인물일수록, 그 운명은 사실보다 더 깊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법입니다. 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낫전차가 처음으로 적진을 향해 굴러갈 그날이요. 그리고 그 전투에서 아브라다타스가 어떻게 되는지, 황금 갑옷을 입혀 보낸 판테아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 충성과 절제로 시작된 이 무대가 비극으로 닫히는 자리는, 다음 이야기의 몫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만 기억해 둘게요. 크세노폰의 키루스는, 자기를 다스려 적의 마음까지 얻는 군주로 그려졌다는 것을요. 그 이상(理想)이 가장 시험받는 순간이, 곧 옵니다.
이 결전과 비극, 그리고 마침내 무너지는 바빌론의 밤은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 7권 (바빌론의 밤)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첫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