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68년, 한 헬레니즘 왕이 알렉산드리아 인근 모래밭에서 로마 사절 한 사람 앞에 굴복했어요. 스스로를 "에피파네스 — 신이 나타나심"이라 부르던 사내가, 지팡이로 그어진 한 줄의 원을 넘지 못한 채 이집트에서 물러났습니다. 그 굴욕의 화살은 이집트가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어요 —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거룩한 성전 위에 이방 제단이 세워지고, 율법서가 불타고, 노학자와 일곱 형제가 신앙을 지키다 죽고, 마침내 모데인의 한 늙은 제사장이 칼을 뽑아 봉기를 일으킨 BC 167–164년의 3년이요.
그런데 여기엔 짚어둘 게 하나 있어요. 이 대목에서 폴리비오스의 손은 끊겨 있습니다 (라쿠나). 그리스 출신 사가 폴리비오스(Polybius)가 남긴 것은 안티오쿠스 4세라는 인간의 초상뿐이고,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마카비서와 요세푸스가 대신 증언해요. 그 끊긴 자리를 어떻게 메우는지가, 이 글의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거룩함이 한 단계씩 팔려 나가다
성전이 더럽혀지기 전에, 그 도시는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져 있었어요. 거룩한 대제사장직이 최고 입찰자의 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습니다.
정통 차독계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는 율법에 충실했어요. 그러나 그의 동생 야손이 안티오쿠스에게 뇌물을 바치고 형의 자리를 사들였습니다(2 Macc 4). 야손은 예루살렘을 헬라식 폴리스로 개조하고 체육관을 세워 청년들을 헬라 풍습으로 길렀어요. 그런데 야손이 보낸 사절 메넬라오스가 더 높은 값을 불러 도리어 야손을 밀어냈습니다. 메넬라오스는 차독계 혈통조차 아니었고, 뇌물 자금을 마련하려 성전의 거룩한 기물을 떼어 팔았어요.
오니아스 3세에서 야손으로, 야손에서 메넬라오스로. 거룩함이 한 단계씩 팔려 나가는 동안, 왕의 군대가 들어올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박해는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요 — 그 내적 토양은 바로 이 매관 부패였습니다.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 — BC 167의 모독
그리고 기원전 167년, 그 열린 문으로 모독이 들어왔어요.
안티오쿠스의 명령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 위에 이방의 제단 — 제우스 올림피오스의 제단 — 이 세워졌습니다. 매일 아침저녁 드리던 상번제가 끊겼어요. 부정한 짐승이 거룩한 곳에서 도살되었고, 그 연기가 지성소를 향해 피어올랐습니다. 율법서 두루마리는 찢겨 불 속에 던져졌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자,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는 자 — 모두 사형이었습니다(1 Macc 1:54-61).
성소 위에 선 그 제단을, 후대의 사람들은 한 구절로 불렀어요.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라고요.
칼과 불꽃 — 꺾이지 않은 무릎
박해는 사람을 무릎 꿇리려 했으나, 어떤 무릎은 끝내 꺾이지 않았어요.
엘르아살은 율법의 교사였습니다. 아흔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학자였어요. 왕의 관리들이 그의 입을 억지로 벌려 돼지고기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그는 뱉어냈습니다(2 Macc 6). 그를 아끼던 자들이 속삭였어요 — 합당한 고기를 가져올 테니, 먹는 척만 하시라고요. 노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기 나이에 위선을 부린다면 젊은이들이 아흔 살 엘르아살도 이방의 길로 넘어갔다 말할 것이라며, 그는 매를 맞으며 형장으로 끌려갔어요.
같은 칼날이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에게 닿았습니다(2 Macc 7). 왕이 보는 앞에서 형제들이 차례로 끌려 나갔지만, 그들은 차례로 입을 열어 같은 믿음을 고백했어요.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하루 만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 나라 말로 속삭였어요 — 너희를 빚으신 분이 너희를 다시 일으키시리라고요. 이 장면은 박해가 개인의 신념과 공동체의 기억을 어디까지 밀어붙였는지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모데인의 칼과 "망치"의 봉기
그러나 엎드러진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떨어진 작은 마을 모데인에, 마타티아스라는 늙은 제사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어요 — 요한, 시몬, 유다, 엘르아살, 요나단(1 Macc 2:2-5). 왕의 관리가 모데인에 들어와 이방 제단 앞에서 제사하라 강요하며, 명망 높은 마타티아스가 먼저 본을 보이기를 요구했습니다.
마타티아스는 거절했어요. 한 유대인이 겁에 질려 제단으로 나아가 제물을 바치려 하자, 늙은 제사장의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습니다. 그는 칼을 뽑아 그 배교자를 그 자리에서 베고, 강요하던 왕의 관리마저 처단했어요. 그리고 외쳤습니다 — 율법에 열심이 있고 언약을 지키려는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1 Macc 2:27). 그는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피했고, 봉기가 점화됐어요. BC 166년이었습니다. 마타티아스는 봉기 직후 노환으로 숨을 거두며 다섯 아들에게 율법과 칼을 함께 물려주었어요(AJ 12.§265-272).
지도권은 셋째 아들 유다에게 넘어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마카베오"라 불렀어요 — '망치'라는 뜻이었습니다.
망치, 성전을 다시 켜다 — BC 164 재봉헌
망치는 정직했어요. 정규군의 대열로 셀레우코스 군과 정면으로 부딪힐 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산악의 지형을 칼처럼 썼어요. 좁은 골짜기에서 적의 행군을 두 동강 냈고, 야음을 틈타 진영을 덮쳤습니다. 섭정 리시아스가 보낸 원정군이 잇따라 무너졌어요(1 Macc 3-4). 마침내 유다의 손이 예루살렘에 닿았습니다.
BC 164년, 망치는 성전으로 들어섰어요. 이방 제단은 헐려 치워졌습니다. 더럽혀진 돌들은 따로 모아 묻고, 깨끗한 돌로 새 제단을 쌓았어요. 거룩한 기물이 다시 들어오고, 꺼졌던 등불이 다시 켜졌습니다. 끊겼던 상번제가, 삼 년 만에, 다시 아침과 저녁의 연기를 하늘로 올렸어요. 유다와 온 백성이 여드레 동안 봉헌의 절기를 지켰습니다(1 Macc 4:36-59). 이 재봉헌이 훗날 하누카 — 봉헌의 절기 — 의 기원이 되었어요.
같은 해,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동방의 페르시스에 있었습니다. 군자금을 노리고 어느 신전을 약탈하려다 실패한 뒤, 그는 원정 중에 병들어 죽었어요(Polyb. 31 단편; 1 Macc 6:1-16). 마카비서는 그 죽음을 성전을 더럽힌 자에게 내린 심판으로 적었지만, 그것은 사료 측의 신학적 해석이에요.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BC 164년 동방 원정 중에 죽었다는 것뿐입니다. 더럽혀진 성소가 정결케 된 그 무렵, 성소를 더럽힌 자는 자기 왕국에서 가장 먼 곳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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