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 초, 지중해 동쪽에는 두 거대한 왕국이 한 세기째 같은 땅을 두고 다투고 있었어요. 북쪽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남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그 사이에 끼인 좁고 비옥한 회랑이 코일레-시리아였고, 그 회랑 안에 작은 산지의 백성이 살고 있었습니다 — 바로 유대였어요.
라피아의 모래 — 남방왕이 이긴 첫 판
이야기는 기원전 217년, 가자 남쪽 라피아의 들판에서 시작돼요. 즉위 다섯 해째의 젊은 왕 안티오쿠스 3세가 코일레-시리아를 되찾으러 남쪽으로 칼끝을 돌렸습니다. 폴리비오스는 그날의 진형을 숫자로 새겨요 — 양쪽을 합쳐 보병 십만이 넘었고, 코끼리들이 양 날개에 도열했습니다(Polyb. 5.79).
맞은편 남방왕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향락에 빠진 왕이라 비웃음을 샀지만, 이날만큼은 달랐어요. 그의 곁엔 처음으로 대규모 팔랑크스로 무장한 이집트 토착 보병 이만 명이 서 있었습니다 — 그리스·마케도니아 용병이 아니라 나일의 흙에서 길어 올린 이집트인들이었어요(Polyb. 5.82).
전투 초반, 안티오쿠스는 직접 우익 기병을 이끌고 적의 좌익을 무너뜨렸어요. 그런데 너무 깊이, 너무 멀리 추격에 몸을 던진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가 적진을 누비는 동안 전장 중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팔랑크스가 한 몸처럼 전진했고(Polyb. 5.85), 안티오쿠스의 중앙이 그 무게에 밀려 부서졌어요. 왕이 돌아왔을 때 승부는 끝나 있었습니다. 라피아는 남방왕의 것이었어요.
그러나 폴리비오스는 승자에게도 칼을 겨눠요.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이긴 전투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의 안락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Polyb. 5.87). 폴리비오스가 보기에 그 자만과 안일이야말로, 한 세대 뒤 셀레우코스의 칼이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만든 빌미였어요. 안티오쿠스는 돌아가는 길에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억했어요 — 패배는 끝이 아니라 미뤄진 청구서라는 것을.
메가스, 대왕이 되어 돌아오다
열일곱 해가 흘렀어요. 그 사이 안티오쿠스 3세는 동방으로 거대한 원정을 떠났습니다 — 메디아를 지나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의 변경까지, 알렉산드로스의 발자취를 되짚는 행군이었어요. 잃었던 동방 속주들을 다시 묶고 인도의 경계에서 코끼리를 조공으로 받아 돌아온 그를, 사람들은 새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 메가스(대왕). 라피아에서 패해 후퇴하던 젊은 왕은 사라지고, 알렉산드로스 이래 가장 넓은 동방을 호령하는 군주가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남쪽 사정은 정반대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고(BC 204) 왕좌엔 어린아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앉았어요. 궁정 음모와 섭정들의 다툼 속에 이집트는 안에서부터 흔들렸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그 약점을 정확히 보았어요. 라피아의 청구서를 받아낼 때가 온 거예요.
파니움, 영화로운 땅이 주인을 바꾸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게 있어요. 폴리비오스의 권16은 온전히 전하지 않습니다. 연속된 본문은 소실됐고, 후대가 베껴 둔 단편(excerpta)만 윤곽을 남겼어요(Polyb. 16.18-19 단편). 그래서 우리는 파니움 전투를 칼끝 하나하나까지 재구성하지는 못해요. 다만 단편이 남긴 결과만은 또렷합니다 — 안티오쿠스 3세가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군대를 파니움 들판에서 격파했다는 것. 요르단 강이 발원하는 헤르몬 산 기슭, 훗날 카이사레아 필리피라 불릴 그곳이었어요.
이 한 번의 승리로 한 세기가 뒤집혔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이래 이집트의 손에 있던 코일레-시리아가 셀레우코스로 넘어갔어요. 그리고 그 회랑 안에 유대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반응은 환호에 가까웠어요. 한 세기의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에 지친 일부 유대인들은 새 주인을 기꺼이 맞았고, 성문을 열어 협조했습니다(josephus AJ 12.§129-137 평행).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쿠스 3세는 협조한 예루살렘에 칙령으로 보답했어요 — 헐린 성전 복구를 지원하고, 제물 비용을 왕실 금고에서 대고, 무엇보다 유대인이 "조상의 율법을 따라" 살도록 허락했습니다(josephus AJ 12.§138-144). 정복자가 피정복지의 신을 존중하는 칙령은, 유대인에게 자비로운 새 시대의 약속처럼 들렸을 거예요.
그러나 그 누구도 그 환호의 순간엔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가 이제 막 두 이교 왕조의 체스판 한복판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그리고 한 세대 뒤, 같은 셀레우코스 왕가에서 율법을 짓밟는 또 다른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요.
딸과 바다 — 클레오파트라와 마그네시아
승리의 정점에서 안티오쿠스는 칼이 아닌 다른 무기를 꺼냈어요 — 혼인이었습니다.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 1세(이집트 왕비가 될 운명)를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시집보냈어요(BC 194/193). 겉으론 두 왕조의 화해였지만 속셈은 달랐습니다 — 딸을 통해 이집트를 안에서부터 손에 쥐려는 계산이었어요(Polyb. 단편; josephus AJ 12).
그러나 책략은 빗나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부친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친정이 아니라 남편과 자신이 다스리게 된 이집트의 편에 섰어요. 안티오쿠스가 딸을 통해 이집트를 삼키려던 그림은 바로 그 딸의 손에서 무너졌습니다.
같은 시기 그의 시선은 서쪽으로 향했어요. 에게 해를 건너 소아시아와 그리스로 진출했고, 자마에서 로마에 패해 망명해 온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로마를 가장 잘 아는 자)을 궁정에 받아들였습니다(~BC 195). 그러나 대가는 컸어요. 기원전 190년, 소아시아 서부의 마그네시아 들판에서 그는 스키피오 형제가 이끄는 로마 군단과 부딪쳤고(Polyb. 21 단편; Livy 37 평행), 동방을 호령하던 대군은 로마의 단단한 보병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듬해 강요된 아파메아 조약(BC 188)은 막대한 배상금과 인질을 안겼어요. 동방의 대왕은 서방 원로원의 청구서에 매인 채무자가 된 거예요.
그 빚을 갚을 돈을 찾아, 안티오쿠스는 옛 정복자들이 늘 그랬듯 신전의 보고로 손을 뻗었습니다. 기원전 187년, 동방 엘람에서 한 신전의 보물을 약탈하려다 분노한 현지인들의 손에 죽었어요. 그가 평생 거머쥔 모든 땅 가운데 가장 작은 한 조각만이 사후에도 셀레우코스의 것으로 남았습니다 — 유대, 그 영화로운 땅. 그러나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도화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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